『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 의하면 걸걸중상(乞乞仲象)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 )출신으로 당나라의 영주(榮州) 지방에 옮겨가 살고 있었다.
696년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함께 억류생활을 하던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나라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하려 하였으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자 토벌군을 보냈다.
걸사비우 집단이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전하고 걸사비우는 전사하였다. 이때는 걸걸중상이 죽은 뒤로서 그의 아들 대조영이 지도자 지위를 계승하여 무리를 이끌고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해고의 부대가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남은 무리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해 천문령(天門嶺)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이는『구당서(舊唐書)』의 기록과는 다르다.『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이 영주 지방을 탈출할 때부터 자기집단의 우두머리였고, 고구려출신이라고 하였으며, 걸걸중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는 대조영의 민족적인 귀속 및 발해국의 성격에 관한 문제로서 논란이 많다. 걸걸중상과 대조영의 관계에 대해서, 두 사람은 동일인으로서 걸걸중상은 토속어로 된 본래의 이름이고 대조영은 뒤에 한자로 지은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고, 양자를 기록 그대로 부자관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논란은『구당서』와 최치원의 글에서는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영주를 벗어난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 반면,『오대회요(五代會要)』와『신당서』에는 처음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집단을 이끌다가 나중에 대조영에게 계승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관계로 보는 견해에서는 『구당서』와 최치원의 글에서는 요동 지방에서의 행적이 대폭 생략되고 동모산에서의 진국(振國)의 건국에 중점을 두면서 걸걸중상이 누락된 것으로 본다. 즉, 건국과정 전체에 관심을 둘 때는 걸걸중상의 존재가 드러나지만, 건국 자체에 중심을 둘 경우 걸걸중상의 존재는 생략되고 대조영을 부각시켜 걸걸중상의 행적에 대조영이 소급 적용된 것으로 보았다.
『오대회요』의 기록은 835년 발해에서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장건장(張建章)이 발해에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발해국기(渤海國記)』에 의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비록 당의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9세기 발해인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사료로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신당서』기록의 전반부는 『발해국기』, 후반부는 『구당서』에 의거해 서술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때문에 『오대회요』와 『신당서』기록에 의거해 대조영과 걸걸중상을 부자관계로 파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