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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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왕경(王京) 출신 관료들의 개인적 신분 표시로 설정된 관등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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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시대 왕경(王京) 출신 관료들의 개인적 신분 표시로 설정된 관등체계.
개설

일반적으로 신라시대 관등이라면 바로 이 경위를 의미한다. 기본적으로는 제1등인 이벌찬(伊伐飡)부터 이찬(伊飡), 잡찬(迊湌), 파진찬(波珍飡), 대아찬(大阿飡), 아찬(阿飡), 일길찬(一吉飡), 사찬(沙飡), 급찬(級飡), 대나마(大奈麻), 나마(奈麻), 대사(大舍), 사지(舍知), 길사(吉士), 대오(大烏), 소오(小烏), 조위(造位)에 이르기까지 17등 체계로 구성되었다.

내용

신라의 경위는『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유리왕(儒理王) 9년(32년)의 일로 나오고 있다. 이를 두고서, 법흥왕(法興王) 때 제도화된 17관등이 일괄적으로 소급·부회되어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가운데 간군(干群)은 재지적 기반의 수장층(首長層)을 재편한 것이며, 비간군(非干群)의 나마와 사지 역시 혈연적 기반을 가진 족장세력(族長勢力)을 일원적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하기 이전에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관등 체계가 이원적(二元的)이었다. 지방민에게는 그들만의 개인적 신분 표시로서 11등으로 정해진 외위(外位)가 주어졌으며, 왕경인(王京人)에게는 따로 경위를 설정함으로써 지방민과 왕경인을 확연하게 구분하였다.

그것은 신라 왕경의 지배자 집단의 폐쇄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경위는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한 신분제인 골품제(骨品制)에 편입된 사람들에게만 지급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 지방민에게도 외위 대신 경위가 주어지면서 외위는 소멸되고 신라 관등 체계가 일원화되었다. 그 뒤에는 관등이라고 하면 곧 경위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17등 경위 체계가 성립한 것은 보통 6세기 초 지증왕(智證王) 또는 법흥왕 때로 생각하나, 그 기원은 부족회의의 전통을 계승한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때의 남당회의(南堂會議)까지 소급된다. 그리고 6세기 초 17등 경위가 완성될 때까지 자체 관등의 기능과 관직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경위제는 520년(법흥왕 7) 율령(律令)이 반포되면서 법제화된 듯하다. 이 때부터 경위는 골품제 및 관직 제도와 밀접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면서 운용되었다. 한편 각 골품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경위의 상한선이 마련되어 있었다.

제일 상급의 지배 집단에 속하는 진골(眞骨) 귀족만이 제1등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고, 그 다음가는 신분인 육두품(六頭品) 귀족은 제6등인 아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오두품(五頭品)·사두품(四頭品)은 각각 제10등 대나마, 제12등 대사가 상한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각 관직에도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의 범위가 설정되어 있었다.

변천

경위는 골품제 및 관직제와 결합되어 운용·변화되었다. 경위 17등 체계의 골격은 신라 말까지 그대로 존속했지만, 삼국통일기에 제1등 이벌찬의 상위 관등으로 대각간(大角干)·태대각간(太大角干)의 특수한 관등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각 골품의 상한선인 아찬·대나마 등에 중위제(重位制)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또한『삼국사기』권40 잡지(雜志) 9 직관(職官) 하(下)에 674년(문무왕 14)에 6부의 진골을 5경(五京)과 9주(九州)에 나가살게 하고, 관명을 별도로 칭하였으며, 그 위계는 경위에 견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외위를 경위로 대치하는 규정으로써 이후 사실상 외위제는 소멸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17등 경위제는 많은 분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신분 계층을 구분하는 기본 구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신라 말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조선총독부, 경인문화사, 1974)
「신라관등제(新羅官等制)의 기원(起源)과 성격(性格)」(하일식, 연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8)
「신라 상고기(新羅 上古期)의 관등(官等)과 정치체제(政治體制)」(김영하,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99·100, 1997)
「신라관등(新羅官等)의 성격(性格)」(변태섭, 『역사교육(歷史敎育)』1, 1956)
「新羅の骨品體制社會」(武田幸男, 『歷史學硏究』299,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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