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20㎞된다. 건천읍을 거쳐 청도, 밀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의 길목에 있다.
이 일대는 밀양강의 지류인 동창천(東倉川)의 상류지역에 해당된다. 고분군은 해발 423m인 방동후산(芳洞後山)의 남서쪽 하단부에 위치하며, 유적이 입지한 곳은 좌우에서 동창천과 작은 계곡이 만나면서 대지를 이루는 곳이다.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고분의 분포상황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89년20번 국도의 대대적인 개수와 포장을 위한 공사 중에 삼국시대 고분 9기와 조선시대 말의 건물지 1개소가 노출되어 1990년경북대학교박물관과 경남대학교박물관이 합동으로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 고분 중 1기는 유실이 심해 구조와 크기를 잘 알 수 없으나 나머지 8기는 석곽묘이며, 이 중 제5호분만이 수혈식(竪穴式)석곽이고 나머지는 모두 횡구식(橫口式)석곽이다. 다만, 횡구식석곽은 대부분 길이 2.5m, 너비 1m 내외의 다소 세장한 장방형 구조로서 추가장이 이루어진 적극적인 증거는 없다. 또한 뚜껑돌이 하나도 확인되지 않아서 원래부터 석개(石蓋)가 아니라 목개(木蓋)였을 가능성이 크다. 벽석은 대부분 냇돌을 그대로 쓰거나 일부 깨어서 사용하였다.
봉토는 유실이 심해 규모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고분은 없었다. 대부분의 고분에서 회청색 경질의 유개고배 및 뚜껑, 단경호, 소옹(小甕), 발(鉢), 대부장경호 및 뚜껑 이외에 적갈색 연질의 발 등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철기로는 낫이나 손칼 등이 나왔다.
고분 중 제2호분은 바닥 규모가 255㎝×95㎝인 세장방형 횡구식석곽으로서 출토된 철기 중에 철탁(鐵鐸)과 철지은장과대(鐵地銀裝 帶)가 특이하다.
유적의 연대는 토기로 볼 때,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이다. 이 유적은 개개 고분의 규모, 유물상이나 고분군 전체의 규모와 연대 등으로 보아, 신라가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실시한 후 형성되기 시작한 소규모 취락의 고분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