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계 학교로는 영남지방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 교육기관이다. 1906년 10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안의와(安義窩, Adams,J.E.)가 대구광역시 남성로에 있는 선교사 사택에서 계성학교를 창설하였다.
교장 안의와, 교사 이만집(李萬集)이 학생 27명으로 수업을 시작했으며, 1908년 대신동으로 이전하였다. 1908년에 지은 아담스관 2층 정면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뜻의 ‘인외상제지지본(寅畏上帝智之本)’이라는 교훈을 부각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이 학교의 교육목적을 엿볼 수 있다.
계성학교는 당시 보수세력이 강한 이 고장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심었고, 과학적 생활과 체육활동을 보급시켜 근대화 조류에 앞장섰다.
1910년 학생비밀단체 양일회가 일제의 강점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 대구에서는 3월 8일 교사 백남채(白南採)의 지휘 아래 목사 이만집, 졸업생 손인식(孫仁植)·김정오(金正悟) 등이 시내의 남녀학생을 규합하여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3·1운동 후 교장으로 부임한 현거선(玄居善, Henderson,H.H.)은 본관(헨더슨기념관)·과학관·유도장 등을 새로 짓고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0년대의 음악교사 박태준(朴泰俊)은 「오빠생각」·「누나야 보슬보슬 밤비나린다」·「고초먹고 맴맴 담배먹고 맴맴」 등의 동요를 작곡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애창되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1943년 예배·성경 과목이 폐지 당했고, 1944년 학교 목사 신후식(申厚植) 등과 학생이 구속되었으며, 1945년 2월 계성학교가 폐교되고 대구공산중학교라는 명칭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광복과 함께 계성중학교로 교명을 되찾았고, 1950년 학제개편에 따라 계성고등학교와 계성제2중학교로 나누어졌다. 1958년 학급수를 각각 24학급씩으로 인가받았다. 그 뒤, 고등학교의 학급수는 1971년 30학급, 1972년 36학급으로 늘었다. 한편, 1963년 부속초등학교가 개교되었으며, 1970년 계성유치원이 설립되었다.
2000년부터 100년 금녀의 계성에 남녀공학의 문이 열렸다. 여학생 3학급이 편성 운영되었다. 2003년 2월에 중국 조양중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2006년 5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계성 한마음축제가 개최되었다. 2006년 10월 호주 고스포드 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2008년 12월에 대구광역시 발명품경진대회에서 최우수교로 2009년에는 우수교로 선정되었고, 2009년 7월에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로 전환되었다. 2016년 3월 중구 대신동에서 서구 상리동으로 이전하였다.
2010년 2월 97회 졸업식을 가졌으며, 2010년 현재 34학급에 학생 수는 1,279명, 교직원수는 81명이다.
교훈으로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잠언 1장 7절)’를 바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동아리 활동으로는 찬양연주반(Under cross), 사물놀이반(한어울), 교지편집부, 신문반(계원)외 18개로 이루어져 활동하고 있다.
체육활동으로는 유도·농구·육상 부문에서 전국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유도는 안병근·김재엽·이경근과 같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