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당시의 교명인 ‘보성(普成)’은 널리 인간의 본성을 계발하고 인간성을 실현시키려는 설립정신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재 양성을 통한 주권 회복으로 독립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교육구국과 자주독립을 그 건학이념으로 하고 있다.
1905년 5월 5일 대한제국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이 한성 전동(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전(前) 아어학교(俄語學校) 건물을 교사로 해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로 설립하였다. 이용익은 일본에 납치되어 체류하는 동안 일본의 근대교육기관을 견학하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아 귀국 후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신념에서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기존의 사립학교들이 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임에 반하여,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된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이었고, 국내 최초의 전문학교였다. 수업연한 2년의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理財學專門科)를 설치하고, 초대 교장에 신해영(申海永)이 취임하였다.
1905년 9월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학생 22명을 인계받아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였다. 1907년 1월 법률학전문과 · 이재학전문과를 각각 법학과 · 경제과로 개칭하고 수업연한을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같은 해 2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용익이 을사조약 이후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1907년 3월 분사(憤死)하게 되자,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李鍾浩)가 학교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종호 마저 1909년 안중근의 이토포살의거(伊藤砲殺義擧)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학교는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듬해 보성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 윤익선(尹益善)이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와 의논하여 학교의 경영권을 천도교가 인수하였다.
1915년 4월 재단법인을 조직해야만 전문학교 인가를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한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시행령」에 따라 격을 낮춰 교명을 사립보성법률상업학교로 개칭하고 3년제의 법률과와 실업과를 두었다.
3·1운동 직후 손병희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또다시 학교 운영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교장 고원훈(高元勳)이 총독부에 전문학교 승격에 관한 타진을 거듭하는 한편, 김병로(金炳魯)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사회 각 계의 독지가들에게 학교의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민간 독지가 58명의 공동 발의로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가 발족하고, 1922년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보성전문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조선총독부의 지나친 간섭과 경제공황, 재단 경영의 악화 등으로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1932년 김성수(金性洙)가 세운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인수되고 김성수는 교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김성수는 3·1운동 직후 거국적으로 일어났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제의 압력으로 실패하자 독자적으로 민립대학을 설립할 뜻을 품고 구미 각국의 대학을 시찰하였으며, 때마침 보성전문학교가 경영난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거액의 사재를 출연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1934년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한 후 지속적으로 도서관, 운동장 등 최신 규모의 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도서와 민속 · 고고품의 수집, 교과목 및 교수 내용의 재정비, 재학생의 활약과 졸업생의 사회 진출 등 외형과 내용에 있어 본격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조선총독부의 압력을 더욱 가중시켜 보성전문학교를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으로 승격시키려는 김성수의 노력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과(農科)의 신설 계획이 승인받지 못하는 등 각종 탄압을 받게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과학기술의 낙후로 궁지에 몰리면서 실업교육만을 강조함에 따라 1944년 4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京城拓殖經濟專門學校)로 교명이 변경되고 경제과 · 척식과만을 두는 등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재단 이사회가 개최되어 다시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가 1946년 8월 정법대학 · 경상대학 · 문과대학 3개 단과대학에 8개 학과로 편성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고려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초대 총장에는 현상윤(玄相允)이 취임하였다.
1946년 제1회 고려대학교 졸업생을 배출하는 한편, 대학원을 개설하였다. 6·25전쟁 중 총장 현상윤이 납북되어 잠시 학교의 기능이 마비되었으나, 1951년 대구에 임시교사를 마련하여 유진오(兪鎭午)가 총장으로 취임하고, 부총장 제도를 신설하면서 학교 경영이 정상화되었다.
피난 중에도 이학계열 학과와 농과대학을 신설하여 규모를 확장하고, 정부 환도 후 종합대학으로서의 체제 정비에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여 1955년과 1959년 두 차례에 걸친 단과대학 및 학과의 개편과 신설을 통하여 법과대학 · 상과대학 · 문리과대학 · 농과대학 · 정경대학의 5개 단과대학을 두게 되었다.
1961년 서관을 준공하고, 박물관 · 농산가공실험실 · 온실 및 그 밖의 부속건물을 신축하였으며, 1963년 이공대학과 우리나라 최초의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66년 이후 이공대학 · 농과대학의 학과를 증설하고 교육대학원을 개원하였고, 1970년에 시작된 장기발전계획에 따라 1971년 12월 학교법인 우석학원과 우석대학교를 병합하였다.
1972년 사범대학을 신설하였으며, 1973년 서독 정부의 무상원조에 의해 농과대학 캠퍼스를 준공하고, 각종 새로운 실험기기와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식량개발대학원을 개원하였고, 이공대학을 이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분리하였다.
1975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중앙도서관 신관을 착공하여 1978년에 개관하였고, 1979년 병설의학기술초급대학을 보건전문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80년 학생기숙사를 건립하고,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조치원캠퍼스를 준공하였다. 1987년 조치원캠퍼스의 명칭을 서창캠퍼스로 변경하였으며, 2008년에는 세종캠퍼스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1년 3월 교원연구년제를 도입하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던 의과대학을 안암동캠퍼스로 이전하였다. 같은 해 10월 안암병원을 준공하고, 인촌 김성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인촌기념관을 준공하였으며, 11월 국제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2년 7월 언론대학원을 신설하고, 8월 국내 대학 최초로 중국 베이징대학교와 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1993년 조치원캠퍼스에 자연과학관을 준공하고, 국제어학원을 부설하였다. 1995년 6월 국내 대학 최초로 미국 아메리칸대학교와 복수학위제 시행에 관한 교류협정을 체결하였고, 같은 해 10월 사범대학에 컴퓨터교육과를 신설하고, 특수법무대학원 · 컴퓨터과학기술대학원이 설치인가 되었다.
1996년 2월 삼성전자㈜와 산학협동 석 · 박사과정 설치에 대한 약정식을 가졌다. 1997년 2월 부득이한 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하였으나 학교의 명예를 빛낸 사람들을 위한 명예학사학위 제도를 신설하여 그 첫 번째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등 5명에게 명예학사학위를 수여하였고, 10월 세종캠퍼스에 인문정보대학원 · 행정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8년 간호학과를 간호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99년 학부제를 시행하고, 보건대학원 · 임상치의학대학원 · 의용과학대학원(세종캠퍼스)을 신설하였으며, 한국학관 · 국제관을 준공하였다. 또한 BK21사업에 3개 연구단과 3개 사업팀이 선정되었다. 2000년 벤처사업창업보육단을 창단하고, 생명과학원 · 한국학도서관을 준공하였다.
2001년 8월 정보통신대학을 신설하고, 2003년 5월 국제교육원을 개원하였다. 2004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제1회 KU-Science Research Festival, 노벨상 수상자 강연회, 세계대학총장포럼, 고구려 특별전, 국제 마케팅 심포지엄, 글로벌 UI 선포식, 국제 학술대회 등을 개최하였고, 재학생 1,000명에게 기념장학금을 전달하였다.
2006년 병설 보건대학을 보건과학대학으로 통폐합하고, 경영전문대학원을 신설하였다. 2007년 법학도서관을 준공하고, 2008년 법학전문대학원이 설치인가 되었다.
학생운동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보성전문학교의 학생 강기덕(康基德) · 김원벽(金元璧)의 주도로 경성 시내 남녀 중등학교 이상 학생 4만 5000여 명이 탑골공원에 모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보성전문학교의 교원 중에서 3·1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한 인물로는 윤익선(尹益善) · 박인호(朴寅浩) · 임규(林圭) 등이 있고, 대다수의 학생간부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교장 최린(崔麟)의 지도를 받아 만세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법과 학생 이계형(李啓亨) · 이사윤(李思允)이 각 학교 학생들을 모아 혁청단(革淸團)을 발기해 3·1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출감한 학생들과 함께 3·1구락부를 조직하고 공창폐지(公娼廢止), 물산장려, 학생 풍기 단속과 일반도의 앙양 등을 호소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에도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여 구속되었으며, 1927년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개최된 하기남선순회강연회(夏期南鮮巡廻講演會)에서 서정관(徐廷觀)이 총독정치를 비판하는 강연을 해서 이른바 ‘보전학생울산설화사건(普專學生蔚山舌禍事件)’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동조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였고, 광복 후에도 1960년 4월 18일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맞서 학생 3,000여 명이 시위를 감행하여 4·19의 선봉적 역할을 하였다.
교훈은 ‘자유 · 정의 · 진리’이다. 2030년 세계 50대 대학 진입을 장기 비전으로 해서 교육과정의 특성화, 진학과 진로 상담 강화, 세계적인 연구역량 확보, 사제동행, 수어과 학습 최우선 등에 역점을 두고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국제교류로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캠퍼스(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 · 피츠버그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 캐나다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 독일 본대학교(University of Bonn), 영국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Kings College London), 중국 베이징사범대학교(Beijing Normal University) 등 해외 470여 개 대학과 교류협정을 맺고 교환학생제, 교환교수제, 연수, 해외 인턴십, 해외문화 탐방, 학술교류 등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국내 대학 최초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 기숙사를 건립하고 매년 100여 명의 학생을 파견하고 있다. 체육 분야에서는 1923년 축구부 창단을 시작으로 1929년 농구부 · 럭비부, 1939년 아이스하키부, 1954년 야구부를 각각 창단하여 현재 24개 운동부를 운영하면서 현재까지 해외원정 회수가 110여 회에 달하며, 총 820여 명의 국가대표를 배출하고 있다.
우리나라 체육계의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연전(高延戰)은 사학의 쌍벽인 양교의 학생, 교직원, 동문 및 연고자가 함께 모여 두 대학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서 매년 9월에 개최하는 행사로 1946년부터 시작된 양교 축구 · 농구의 정기전이 그 시초이다. 이후 1956년 야구 · 럭비 · 아이스하키 세 종목이 추가되었고, 1965년부터는 이틀 동안 다섯 경기가 일제히 치러지는 지금과 같은 경기방식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밖에 대표적인 연례행사로 1962년부터 5월 5일 개교기념일 전후로 열리고 있는 대학축제 석탑대동제(石塔大同祭)와 4월 18일에 4·18 고대생의거와 4·19를 기념하여 서울캠퍼스에서 4·19국립묘지까지 수천 명의 학생이 행진하는 4·18구국대장정이 있다.
교내 언론으로 1947년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인 ‘학생의 날’에 창간된 대학신문 주간 『고대신문』은 국내 최초의 대학신문이며, 1945년 창간된 교지 『고대문화』는 연 2회 발행하였으나 2003년부터 월간으로 발행되고 있다. 그 밖에 1954년 창간된 영자신문 『The Granite Tower』, 1960년 창간된 경영전문지 『경영신문』, 1983년 창간된 여성지 『석순』이 있고, 교육방송국(KUBS)과 KUTV를 운영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서울캠퍼스는 20개 대학원, 15개 단과대학(학과 78), 5개 학부에 학부생 1만 5,826명, 전임교원은 1,333명이다. 부속기관으로 평생교육원 · 국제어학원 · 도서관 · 기숙사 등이 있고, 부설연구기관에 법학연구원 · 철학연구소 · 정보통신기술연구소 · 반도체기술연구소 · 동북아경제경영연구소 등 80여 개가 있다.
세종캠퍼스는 5개 대학원, 3개 단과대학(학과 · 부 22), 1개 학부에 학부생은 6,930명, 전임교원은 234명이다. 부속기관으로 기숙사 · 국제교류교육원 · 학술정보원 등이 있고, 부속연구기관에 한국학연구소 · 광전자신소재연구소 · 사회체육연구소 · 산업개발연구소 · 경제통계연구소 등이 있다.
주요 기관 · 시설은 다음과 같다. 도서관은 중앙도서관(신 · 구관) · 과학도서관 · 의학도서관 · 법학도서관 · 보건과학도서관 · 세종학술정보원(세종캠퍼스) 6개 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도서관 신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 동시 수용능력 2,000여 명에 장서 보유능력 200만 권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1937년에 준공된 고딕양식의 중앙도서관 구관은 신관이 개관되면서 대부분의 기능을 신관에게 넘기고 지금은 대학원생들의 열람실, 교수 연구실, 서고로 사용되고 있으며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34년 건립되어 백주년기념삼성관으로 이전한 박물관은 1974년 국보로 지정된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1989년 국보로 지정된 동궐도, 1985년 국보로 지정된 혼천시계 등 국보급 문화유산과 민속품, 정선 · 김정희 · 김홍도 등의 고서화, 이중섭 · 박수근 · 김환기 등의 현대 미술품 등 역사 · 민속 · 고고학 · 미술 분야 10만여 점을 소장 · 전시하고 있다.
서울캠퍼스의 기숙사인 안암학사의 수용인원은 800명이고, 현재 8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신축 중이다. 세종캠퍼스의 호연학사는 4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2,6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서울캠퍼스 인문사회캠퍼스의 중앙에 위치한 중앙광장은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기존의 대운동장을 개조하여 2002년 3월에 완공된 것으로, 지상에는 1만 9,000m²의 광장, 지하 1층에는 행정부서 및 편의시설, 지하 2층과 3층에는 1,000여 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주차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인촌기념관은 연면적 7,176m²의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구 인촌 김성수의 묘지 자리에 건립되었으며, 1,000여 석 규모의 대강당과 교수휴게실, 세미나실을 갖추고 주로 학술 및 문화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국제관은 연면적 2만 4000m²에 지하 2층, 지상 7층의 건물로 고려대학교 단일 건축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1999년 준공되어 ‘99 건축미전’ 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주로 국제대학원 시설과 국제어학원 강의실로 이용되고 있다.
본관은 김성수가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면서 건립한 고딕건축 양식의 6층 건물로 대표적인 근대 서구 양식의 건물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서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