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시기·체재·내용은 미상이다. 명칭을 볼 때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합의, 결정된 내용을 정리해 기록한 문서로 추측된다.
최초로 명칭이 나타난 기록은 『문종실록』으로, 1450년(즉위년) 10월 경진조에 예문관제학 이선제(李先齊)가 상서한 내용 중에 그 일부를 인용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서북계의 군비내용 일부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구주(龜州)·영주(寧州)·맹주(猛州)·인주(麟州) 등 4성의 수비군 내용과 인원을 기술한 부분, 둘째 서북계 41성의 병원(兵員)과 기타 요원의 인원수를 기술한 부분이다.
그와 함께 문종 즉위년은 『고려사』 완성의 한 해 전이고, 이선제는 『고려사』 편찬자 중 한 사람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 법안이 『고려사』 편찬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법안에 기술된 서북계의 군비와 『고려사』 병지(兵志) 주현군조(州縣軍條)의 내용을 대비해 보면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특히 맹주의 경우로, 1104년(숙종 9)에서 1109년(예종 4)에 걸쳐 여진정벌을 위해 모집한 신기(神騎)·보반(步班)이 『고려사』 병지에서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서북계의 군비내용이 전체적으로 초맹(抄猛)·좌맹(左猛)·우맹(右猛)·보창(保昌)과 잡척(雜尺)으로 소정(所丁)·진강정(津江丁)·부곡정(部曲丁)·역정(驛丁) 등이 있고, 백정군(白丁軍)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고려 병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고려사』 병지의 내용을 보충해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이 법안을『고려사』 범례와 예지 서문에 보이는 『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의 별칭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