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까지 경상도에 있었다. 삼국시대의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고려 현종 때 진주목에 속하였다. 1419년(세종 1) 현의 북쪽 20리 지점인 소곡산(所谷山)에 어태(御胎: 왕의 태)를 안치한 뒤, 남해현(南海縣)과 합쳐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1424년남해군이 분리되면서 곤양현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곤양군이 없어지면서 하동군의 관할에 들게 되었으며, 진교면 진교리 지역으로 본다.
지형상으로 금오산의 동북쪽 산기슭에 있으며, 군사적인 면보다 교통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던 취락이었다. 남쪽의 노량(露梁)에서 양포역(良浦驛)을 거쳐 곤양에 이르는 길목에 발달하였으므로 하동의 고읍(古邑)을 지나 하동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곤명’이라는 명칭은 역리사상(易理思想)의 곤(昆)과 지역승화(地域昇華)의 명(明)이 합쳤고, 이곳에 세종의 태를 묻었다는 점 등으로 보아, 풍수지리사상에서 말하는 길상지의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