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학동 고분군은 2004년 4월 10일에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공주시 금학동 산 4-1임과 46-1전 일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이 고분군에 대하여서는 이미 일제시대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왔고, 그 후에는 1960년과 1989년 및 1999년에는 금학동 터널공사와 관련하여 조사가 이루어져 재차 확인된 바 있다.
2000년도 조사 결과 확인된 유구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21기, 돌덧널무덤(石槨墓) 5기, 움무덤(土壙墓) 1기, 돌덧널독널무덤(石槨甕棺墓) 3기, 구덩이(竪穴) 3기, 고려시대 이후의 움무덤 12기 등 총 45기로 예상외로 많은 고분이 노출되었다. 특히 굴식돌방무덤은 전체 조사지역 내에서도 약 900여 평의 면적에 밀집되어 노출되었으며, 천장과 봉분의 일부가 유존된 돌방무덤 1기를 포함하여 대부분 잔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또한, 조사 중 공사 지역내의 민가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굴식돌방무덤 3기가 추가로 노출되었으며, 1989년도에 조사된 바 있는 터널형 돌방무덤 1기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의 굴식돌방무덤은 조사지역 중앙의 계곡을 기준으로 서쪽의 주능선 남향 사면에 밀집되어 분포하며 장축 방향은 모두 경사면 방향을 따라 남-북 방향에 가깝게 조성되었다. 현 조사지역의 북쪽 경계선 윗쪽의 야산 정상부 일대에는 도굴공으로 추정되는 웅덩이와 봉분의 잔흔으로 추정되는 얕은 분구들이 남아 있어서 야산 정상부 일대에도 석실분이 분포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돌덧널무덤은 돌덧널의 장축 방향이 경사면 방향과 동일한 남-북 방향인 것이 2기, 등고선 방향과 평행한 것이 3기가 확인되었다. 장축이 경사면 방향을 따른 돌덧널무덤은 조사 지역 서쪽의 굴식돌방무덤 분포지역에서 확인되었는데 돌덧널의 남벽이 모두 유실되어 출입시설의 형태가 분명치 않으나 앞트기식이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상호간에도 벽석의 축조 수법과 출토 유물에서 차이를 보여 축조 시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장축이 동-서 방향인 돌덧널무덤은 조사지역 동쪽 경사면에서 노출되었는데 모두 구덩식(竪穴式)이다.
돌덧널독널무덤은 위의 구덩식돌덧널무덤 분포지역에서 2기, 조사지역 남쪽의 민가 아래 밭 경작지에서 1기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움무덤(土壙墓) 1기는 조사지역 중앙의 동남쪽 경사면에서 확인되었고, 고려시대 이후의 움무덤은 조사 지역 전역에서 확인되었다.
굴식돌방무덤은 평면 형태와 축조 수법 등에서 터널형 1기를 제외하고는 상호간에 크게 다르지 않은 정형성을 보이고 있다. 봉분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았으나 2호분은 돌방 천장 위로 약 0.25∼0.8m 정도의 봉토가 덮인 상태로 확인되었다. 2호분의 봉분 상부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움무덤이 중복 조성되는 과정에서 봉토를 삭토하여 많이 파괴된 상태이므로 현재 잔존한 높이보다는 더 높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원래의 봉분 지름은 10m를 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가장 북쪽에 위치한 8호분은 천장이 함몰되면서 봉토가 그대로 내려앉아 있었는데 적갈색 점질토와 흑갈색과 황갈색의 사질토가 각 5∼10㎝ 내외의 판축 형태로 다져져 있었다. 봉분의 평면 형태는 알 수 없었다. 무덤구덩이는 화강풍화암반 또는 암반층 위에 자연퇴적된 고토양층을 깊이 파고 조성한 지하식으로 천장이 남아 있는 2호분의 경우 무덤구덩이 어깨선보다 아래에 천장이 축조되어 있다. 따라서 잔존 상태가 양호한 돌방무덤의 경우 무덤구덩이 깊이는 2.2m를 넘는 정도이다. 무덤구덩이의 벽면에는 삽이나 괭이 등의 굴지구 흔적이 깊게 남아 있었으며, 돌방의 벽면이 내경된 것과 같이 무덤구덩이의 벽도 내경되게 굴광하였다. 내부 돌방의 축조 재료는 인두대의 납작한 깬돌을 이용하여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혼용하여 축조하였고, 벽석의 틈새는 작은 깬돌편들로 고였다. 대부분의 돌방무덤은 하단석과 천장석의 크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13호분에서는 벽면 하단에 큰 자연 판돌을 세워 쌓은 후 그 위에 작은 깬돌들을 눕혀 쌓았다.
돌방 규모는 대체로 남-북 길이가 2.7∼2.9m 내외이고, 동-서 너비가 1.4∼1.6m 정도로 장·단비는 1.7∼2.0:1 내외이다. 돌방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 일색이나 1호분은 장·단비가 1.4:1 정도로 비교적 방형에 가까웠다. 돌방의 벽은 네 벽을 허리 높이까지 수직으로 쌓아 올리다가 그 위부터는 조금씩 내경시켜 궁륭상의 천장을 이룬다. 그러나 돌방의 평면 형태가 남-북 장축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어서 동·서 장벽보다는 남·북 단벽쪽의 내경이 두드러진다. 기존에 분류된 아치형의 천장과 유사하나 동·서 장벽의 윗부분도 내경되어 있으므로 궁륭상 천장과 아치형 천장의 중간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궁륭상 천장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변화된 형태를 변형 궁륭상 천장이라고 하겠다. 25호분은 터널형으로 북벽이 수직에 가깝게 올라서고, 동·서벽은 허리 높이에서부터 조금씩 내경하고 있어 천장부 근처에서 거의 맞닿은 형태의 천장구조를 하고 있다. 서벽의 대부분과 남벽 그리고 널길(羨道), 무덤길(墓道)은 모두 유실되었다. 돌방 바닥은 대부분 생토면 그대로이며 널받침(棺臺)이나 주검받침(屍床)도 설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12호분은 바닥에 납작한 깬돌로 3열의 배수로를 시설하면서 자연스레 바닥 전면에 돌이 깔린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돌방무덤 밀집지역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3호분은 바닥에 작은 깬돌들을 전면에 깔았는데 앞서의 굴식돌방무덤들보다 규모도 작고 벽석의 축조수법도 다른 형태였다. 널길(羨道)은 모두 돌방의 남동쪽에 우편재한 형태였다. 널길의 천장은 돌방의 천장과 달리 길이 1m가 넘는 대형 판돌을 2매 정도 올려놓았으며, 피장자를 최종 안치한 후 널길을 대·소 깬돌로 막아 폐쇄하였다. 널길의 길이는 0.94∼2.05m로 많은 차이를 보였는데 무덤구덩이가 깊게 축조된 석실분일수록 널길의 길이가 긴 편이었다. 널길의 너비는 0.66∼0.86m 정도이고, 높이는 0.8m 전후였다. 널길의 앞에는 다시 봉분 앞쪽까지 연결되는 무덤길이 남아 있었는데 무덤길은 특별한 석축시설 없이 생토면을 파고 조성하였다. 무덤길의 바닥 높이는 돌방 바닥에서부터 평탄하게 이어지나 일부 바닥 시설이 없는 돌방무덤에서는 무덤길 끝 부분에서 경사져 올라선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배수 문제가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배수로가 시설된 굴식돌방무덤은 6기로 이 중 4기는 얇은 판돌로 배수로 위에 뚜껑을 덮은 형태였다. 1호분에서는 북벽 아래에 좁은 도랑을 파고, 다시 동벽을 따라 널길 밖까지는 덮개를 덮은 배수로 시설을 설치하였다. 12호분에서는 89년도 금학동 1호분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3열의 배수로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2000년에 조사된 12호분의 배수로 시설은 보다 정교하며 덮개돌을 바닥 전면에 깔았다. 동벽 아래의 배수로는 무덤길까지 길게 연장되어 북벽에서부터의 총 길이가 약 6.5m 정도였다. 굴식돌방무덤의 피장자 안치에는 널을 사용하였으며, 바닥에서는 널못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널못 중에는 다른 유물과 높이 차이를 보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추가장을 했던 것으로 추정케 한다. 이러한 추가장의 흔적은 널길이나 무덤길의 평·단면상 토층에서도 확인되었다.
굴식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세발토기(三足器),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 뚜껑접시, 입큰목긴항아리(廣口長頸壺), 항아리, 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 등의 토기류와 널못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2호분에서는 돌방 내부를 정리하던 중 도굴되는 과정에서 일부 잔존된 금제 화형장식(花形裝飾) 1점, 금제 엽형장식(葉形裝飾) 1점, 금제 영락(瓔珞) 1점 등이 수습되었다. 금제 화형장식은 지름 2.1㎝로 중앙 원좌를 중심으로 6개의 화판 주연부를 따라 타출세선(打出細線)을 돌렸다. 금제 엽형장식은 길이 4.6㎝로 끌이나 가위로 금판의 가장자리를 잘라 엽맥(葉脈)의 효과를 낸 것으로 이러한 형태의 장식은 무령왕릉 왕비 족좌에도 장식되어 있다. 금제 영락은 심엽형을 거꾸로 세운 형태로 가장 자리에 새김눈테를 돌려 접합하였다. 이외에 24호분에서는 금제 화형장식 1점과 영락 2점, 장식 1점이 출토되었고, 26호분에서는 영락 1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14·16·18호분에서는 백제 고분에서는 출토 예가 거의 없는 반지(指環)로 판단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반지의 지름은 완형(完形)의 것이 각 2.05㎝와 1.9㎝인 원형이고 외측에 새김눈을 장식하였다. 소재는 은(銀)이며, 표면에 금을 도금한 은지금장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무령왕비의 금제 팔찌를 그대로 축소한 것과 같은 형태이다.
굴식돌방무덤의 축조시기는 고분의 축조수법, 형태, 부장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백제 웅진도읍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돌방의 평면 형태가 방형 위주인 송산리 고분군과 웅진동 고분군 등의 축조시기를 고려할 때, 금학동 고분군의 축조 시기는 대략 6세기 전반을 전후한 시기로 판단된다.
돌덧널무덤(石槨墓) 5기 중 2기는 남-북 장축의 앞트기식(橫口式)으로 추정되며, 3기는 등고선과 평행한 동-서 장축의 구덩식(竪穴式)이다. 구덩식돌덧널무덤은 조사지역 동쪽 경사면에 축조되어 묘역을 달리하고 있다. 앞트기식돌덧널무덤 2기는 돌방무덤 분포지역에서 확인되었는데 상호간에도 축조수법과 유물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20호분은 잔존길이, 너비, 높이가 2.55×0.64×0.53m로 바닥은 생토 바닥이다. 벽석은 수직으로 축조하였고, 천장석은 유실되어 알 수 없었다. 유물은 돌덧널의 북벽쪽에 굽다리접시와 뚜껑접시, 소형 항아리 2점이 부장되어 있었고 바닥 전면에서 널못이 출토되었다. 또한 21호분의 규모는 1.32×0.66×0.58m이다. 북벽 상부에는 천장석 1매가 남아 있었는데 천장석 아래의 벽석을 좌우에서 약간 내민 후 천장석을 올렸다. 바닥은 생토 바닥이며 유물은 청동제 허리띠편이 출토되었는데 양식상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구덩식돌덧널무덤 가운데 23호분의 무덤구덩이는 2.25×0.8×0.35m이고, 돌덧널의 길이, 너비는 1.9×0.45m로 천장석은 유실되었다. 돌덧널 바닥에 납작한 판돌을 깔았으며 출토 유물은 없었다. 나머지는 23호분 북쪽에서 확인되었는데 4호분과 22호분은 23호분보다 규모가 큰 편이며, 4호분 내부에서 널못으로 추정되는 쇠못과 낮은 굽이 달린 토기 저부편, 기와편 등이 바닥에서 뜬 상태로 출토되었다.
움무덤(土壙墓)은 내부에 나무널(木棺)이 안치되었다. 장축은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다. 규모는 무덤구덩이가 1.97×0.96×0.55m이고, 널은 1.66×0.6m이다. 널 내부에 입곧은항아리(直口壺) 2점과 회청색 경질 독 1점이 노출되었는데 이 중 독은 파괴되어 널 상부에 흩어진 상태였다. 항아리 2점도 바닥에서 약간 뜬 상태로 노출되어 토기류는 모두 널 상부에 부장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널 바닥에서는 쇠낫(鐵鎌) 1점과, 철정(鐵釘)이 출토되었다. 백제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돌덧널독널무덤은 4호분의 남쪽에서 2기가 인접하여 노출되었다. 독널의 주위에 깬돌을 둥글게 돌렸으며, 이 중 북쪽의 1호는 돌덧널 내부의 규모가 0.58m 정도였으며, 돌덧널 내부에 대형 독 1점이 횡치되어 놓여 있었다. 1호 독널무덤의 남쪽에도 이보다 작은 돌덧널독널무덤이 노출되었고, 조사지역의 남쪽 밭 경작지에서도 돌덧널독널무덤 1기가 확인되었다.
구덩이(竪穴)는 굴식돌방무덤 밀집지역에서 노출되었으며, 10호분을 중심으로 동·서쪽에서 모두 3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 비교적 형태가 뚜렷한 1호 구덩이의 규모는 길이 4.8m, 너비 2.73m, 남쪽 바닥의 최대 깊이 0.42m로, 암반을 굴착하여 조성하였다. 평면 형태는 경사면 위쪽이 넓고 아래가 좁은 부채꼴 모양이며, 바닥은 경사면 위에서 아래로 급하게 흘러내리는데 구덩이 남쪽에서 완만한 평탄면을 이룬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없었다. 이 구덩이의 성격은 분명치 않으나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주위에 축조된 굴식돌방무덤의 무덤구덩이 형태와 닮아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편이어서 돌방무덤 축조를 위해 무덤구덩이를 굴착하다가 암맥이 노출되어 작업을 중단한 미완성 유구가 아닌가 추정된다.
금학동 돌방무덤들은 그 동안 백제 웅진도읍기 굴식돌방무덤의 세부 구조와 묘제 변천 과정의 연구에서 부족했던 많은 부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기존에 조사된 백제 굴식돌방무덤들이 천장이 함몰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천장 구조의 연구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번에 천장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은 굴식돌방무덤이 조사되어 앞으로 이러한 형태의 석실분 연구에 있어서 대단히 유용한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돌방무덤 상부의 봉분까지 함께 조사되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돌방무덤 내부에서 각종 금제 장식과 은제 금장반지, 각종 토기류 등이 출토되어 부장 유물에서도 풍성한 자료가 출토되었다. 특히 은제 금장반지는 백제지역의 예로서는 처음 출토된 것으로 주목된다. 이러한 금은제 장식과 장신구는 왕을 정점으로 한 백제의 중앙 지배층과 일부 재지 수장세력만이 소유하였던 것으로 피장자의 신분과 돌방무덤의 축조시기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며, 돌방무덤의 구조적 특징과 함께 백제 지배층의 묘제와 장제 그리고 웅진도읍기의 사회·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