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미국인 선교사 우리암(宇利巖, Williams, F. E.)이 남학생을 위한 중흥학교(中興學校)를 설립하였다. 명선여학당은 보통과 4년제의 초등교육을 실시하고, 중흥학교는 보통과 4년제와 고등과 2년제를 병설하였다. 교과목은 성서·국어·역사·지리·영어·이과·산수·창가·도화·체조·수예 등을 가르쳤으며, 1907년 명선여학당을 영명여학교로 개칭하였다. 1908년 세 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09년 중흥학교는 영명학교로 개칭되었다. 1914년까지 영명여학교는 8회의 초등과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15년 중등학교인 3년제 영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하여 이전의 교과에 요리법·편물·자수 등을 추가로 가르쳤으며, 1917년 7월 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19년 2월 8일 제3회 졸업생 윤창석(尹昌錫)이 동경(東京)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동했으며, 이에 따라 3·1운동 때 재학생 5명이 공주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사애리시는 당시 유관순(柳寬順)을 발탁하여 영명학교에서 교육시켰으며, 나중에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 전학시켰다. 1921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 100주년기념관을 학교에 건립하였고, 1932년 총독부의 압력으로 2년제 영명실수학교로 개편되었다. 남자부와 여자부를 나란히 설치하였으며, 영농과 식생활 실습이 주요교육과정이었다.
1930년 중반 이후 일제의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1940년 교장 우리암이 강제 출국당했으며, 1942년 강제 폐교당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 1949년 9월 졸업생들의 노력에 따라 영명상업중학교로 복귀되었다.
1951년 3월 인문계 고등학교로 개편되어 6학급의 영명중학교와 영명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며, 남학생만을 모집하였다. 1964년 7월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운영권을 인수받아 학교법인 감리교영명학원을 설립하였다. 1979년 3월 여학생부를 신설, 남녀공학으로 개편하여 1941년 폐교 이래 38년 만에 여학생을 다시 모집하였다.
2006년 개교 100주년 행사가 있었으며, 2015년에는 95회 졸업식이 있었다.
2010년 현재 1학년 남 8개 학급과 2학년 남 7개, 혼성 1개 학급, 3학년 남 5개, 혼성 3개 학급을 비롯하여 총 24개 학급이 개설되어 있으며, 남 787명과 여 10명 총 797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교원 33명과 일반 행정직 22명 등 총 55명이 재직 중이다.
교육목표는 ‘기독교 사랑을 실천하는 도덕인 육성, 수준 높은 학력을 지닌 지식인 육성,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지식인 육성, 튼튼한 체력과 정서를 갖춘 건강인 육성’이다. 특색사업으로는 ‘바른품성 5운동, 양서읽기-연50권이상, 수시상담 멘토링제’ 등이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