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공중린(孔仲麟), 아호는 서양(曙洋). 필명은 운서(雲曙)·시예리(詩藝里). 함경남도 이원(利原) 출생.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8·15광복 후 월남하여 김윤성(金潤成)·정한모(鄭漢模)·조남사(趙南史) 등과 함께 동인지 『시탑(詩塔)』을 발간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49년 3월호 『백민(白民)』에 「바다」를 발표하고 나서부터다. 그는 감정을 분방하게 방출시키는 낭만파적 기질을 지닌 시인이었다. 한때 종합잡지인 『신세기(新世紀)』의 편집기자를 지냈다.
1950년부터 한국문화연구소에 입소, 작가인 최태응(崔泰應)과 함께 『별』을 편집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헌구(李軒求)·모윤숙(毛允淑) 등과 함께 문총구국대를 결성하여 활약, 이 때에 쓴 작품들은 격렬한 감정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애국심을 고취한 것이었다.
그 대표작이 「민족투쟁의 노래」(국방, 1953. 6. 7.), 「최후의 무지개」(자유세계, 1953. 6.) 등이다. 1952년『희망(希望)』 편집장, 이어 『현대여성』·『여성계(女性界)』편집장을 역임하였고, 또한 『자유신문』·『삼천리』 등의 주간을 지냈다.
1957년 삼천리사에서 시집 『무지개』를 출간하였고, 이어 다음해 사진을 곁들인 시집 『조국(祖國)』을 냈다. 대표작으로는 「나무」(자유문학, 1957. 11.), 「유랑(流浪)」(1957. 12.), 「영곡(靈曲)」(1958. 5.), 「조국의 음악」(현대문학, 1958. 6.), 「백자부」(자유문학, 1958. 11.) 등이 손꼽힌다.
단적으로 보아 그는 말을 견고하게 다지거나 신상을 제시하는 작품을 쓰기보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동을 방출하는 경향의 시를 썼다. 편저로 『전시한국문학시편(戰時韓國文學詩篇)』(1955. 6.)과 『세계여류시인집』 등이 있고 수필집 『강남춘(江南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