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에는 천정구현(泉井口縣, 일명 屈火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교하군으로 개칭하고 봉성현(峰城縣)과 고봉현(高峰縣)을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1018년(현종 9)양주에 이속되었다.
1394년(태조 3)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고, 한양에 속한 심악현(深岳縣)과 부평(富平)에 속한 석천향(石淺鄕)을 예속시켰다. 1414년(태종 14) 심악은 고양현(高陽縣)에, 석천은 원평부(原平府, 또는 坡州府)에 각각 이속시켰으나 곧 복구되었다.
1687년(숙종 13) 현(縣)을 폐하고 파주(坡州)에 예속시켰고, 1733년(영조 9)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동시에 군치(郡治)를 금성리(金城里)에 정하였는데 뒤에 후율동(朽栗洞)으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 때 파주군에 편입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복구되어 경기도의 4등군 교하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파주군에 편입되어 교하면이 되었으며, 1996년파주군이 시로 승격되었다. 광해군 때 이의신(李懿信)이 주장한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의 대상지가 바로 이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