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 소국 가운데의 하나로서,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지방에 있었다.『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 또는 ‘구야한국(狗耶韓國)’으로 기록되었으며, 본가야국(本伽耶國), 즉 금관가야(金官加耶)의 모체로서『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락(駕洛·伽落)’·‘가라(加羅)’·‘가라〔加良〕’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야국은 입지적으로 낙동강을 따라 경상도 각 지역과 통하고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들어가는 해로상의 중요지점으로서, 일찍부터 외부세력과 빈번한 교섭이 있어온 지역이다. 특히, 진한(辰韓)·변한의 철자원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동예(東濊)·마한(馬韓)·왜(倭) 등과 철을 매개로 활발한 교역관계를 가지면서 한반도 초기철기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김해 지역에는 신석기시대 이래 다수의 주민집단들이 거주해왔으며,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현재의 김해시를 비롯해 주촌면·장유면·대동면 등지에 각각 독자적인 정치집단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서기전 2세기경에는 김해시를 중심으로 풍부한 청동기를 소유하는 상당한 규모의 정치집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 뒤 이러한 유력집단을 토대로 인근지역의 소집단들 사이에 정치적 통합이 진행됨으로써『삼국지』의 구야국이 성립된다. 소국 가운데 비교적 큰 나라가 중심이 되어 연맹적 결속을 한 정치체가 지역연맹체인데, 2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변한의 구야국은 지역연맹체에서 주변 소국들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2세기 후반 구야국 국읍(國邑)의 주 고분군인 양동리고분군 중 가장 오래된 고분인 ‘양동리 162호분’은 대형 장방형 목곽묘(木槨墓)일뿐 아니라 유물에서도 한경 2매를 포함한 10매의 동경(銅鏡)과 수정다면옥, 유리구슬목걸이 등 수준 높은 위세품(威勢品)과 다량의 철정(鐵鋌), 철촉(鐵鏃), 철모(鐵矛) 등 철제무구, 재갈 등을 부장하고 있어 그 세력의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1세기 전반 9간(九干: 아홉개 토착세력집단의 족장)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구야국)을 세웠다는『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의 수로왕(首露王)은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를 배경으로 하는 유이민 집단으로서, 청동기시대 이래 존속해 온 김해 지역의 다수 정치집단들을 통합하는 주도세력으로 해석되고 있다. 9간에는 몇 개의 읍락(邑落)을 거느린 소국의 수장은 물론 소국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한 읍락의 수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로왕은 소국이 아닌 이들 지역연맹체의 수장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또한, 구야국은 정치적 지배자인 신지(臣智)에게 ‘구야진지렴(狗耶秦支廉)’이라는 우호(優號)를 부여해줄 정도로 유력한 소국이었으며, 4세기까지는 낙동강하류 및 남해안지역의 일부 소국들을 통솔하는 하가야(下伽耶)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는『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왕(婆娑王) 23년(102년)조에 실려 있는 신라와 수로왕의 일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영토분쟁 해결을 위해 수로왕을 초빙한 사례이다. 게다가 수로는 자신에 대한 접대에 부당한 대우를 한 한기부(漢祗部)의 수장인 보제(保齊)를 죽이고 자국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사로국(斯盧國)에 비해 위상이 높았던 구야국은 3세기 무렵 사로국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그 위상이 역전된다. 이후 광개토왕(廣開土王)이 파견한 고구려 남정군(南征軍)에 의해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어 532년(법흥왕 19)신라에 병합되기까지 주변 강대세력의 교역중개지로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