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이 제정한 육예의 하나인 구수(九數)는 방전(方田), 속미(粟米), 차분(差分), 소광(少廣), 상공(商功), 균수(均輸), 영부족(盈不足), 방정(方程), 방요(旁要)이다. 차분은 최분(衰分), 방요는 구고(句股)로 바꾸어서 구장으로 저술한 산서가 『구장산술(九章算術)』이다. 동양 산학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구장산술』은 전한시대(前漢時代, 서기전 206∼서기 8)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유휘(劉徽)가 263년, 『구장산술』에 주를 달면서 쓴 서문을 통해 장창(張蒼)과 경수창(耿壽昌) 등에 의하여 완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순풍(李淳風)이 주를 첨가하여 그가 편집한 『산경십서(算經十書)』에 넣은 것이 여러 판본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말에 이르러 이적(李籍)은 『구장산술음의(九章算術音義)』를 저술하였으며 남송의 양휘는 『상해구장산법(詳解九章算法)』(1261)과 『상해구장산법찬류(詳解九章算法纂類)』(1261)를 출판하였다. 이것은 유휘 이후에 발전한 산학으로 『구장산술』을 재정리하고 또 비류(比類)라는 항목을 새로운 내용으로 첨가한 것이다. 『찬류』와 달리 『상해구장산법』은 영부족, 방정, 구고, 상공, 균수 등만 전해지고 있다.
안지재의 『상명산법』(1373)의 구장명수에는 속미(粟米)를 속포(粟布)라 하였다. 또한 이책을 보완하여 이황(李潢)이 『구장산술세초도설(九章算術細草圖說)』(1800)을 출판하였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구장산술』에 대한 언급이 확인되지만 출판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신라와 고려에서 산원을 뽑는 시험 과목이 있어 『구장산술』이 연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도 19세기 이전에 『구장산술』이 들어온 흔적은 없다. 조태구의 『주서관견(籌書管見)』에 『구장산술』의 각장 제목만 사용하고 당시의 결과를 대응되는 제목 아래 배열하였다. 『구장산술』 원본을 제대로 연구한 조선의 산서로 현존하는 것은 남병길이 서양 수학의 영향을 받아 저술한 『구장술해(九章術解)』가 유일하다.
『구장산술』은 문제, 답, 답을 얻는 과정을 술, 주의 순서로 기술하며 이 과정을 통하여 수학적 구조와 응용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구장산술』에서 취급하는 수는 유리수이고, 산대를 사용하는 자연수의 연산은 이미 아는 것으로 가정하였다.
『구장산술』은 유휘의 서문에서 만물의 일을 결정하는 팔괘(八卦)를 비롯하여, 역법(曆法), 율려(律呂) 등 모든 것이 수학을 통하여 해결되고, 수학적 구조를 통하여 복잡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역경』의 괘사에 나오는 ‘인이신지(引而伸之)’를 언급하는데 후대의 산학자들은 이어 나오는 ‘촉류지장(觸類而長)’을 함께 언급하면서 귀납과 연역을 통하여 수학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 수학을 이해하였다. 죽간(竹簡) 형태의 서적이지만, 문제들의 배열과 주를 보면 수학적 구조를 일관된 논리로 정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저술된 모든 산서가 『구장산술』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