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월 6일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이 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로 한성부 중서 미동 제30통 4호에서 창간하였다. 초대 사장은 일진회 회장인 이용구였으며, 자본은 관찰사를 지냈던 일진회 간부 김세기(金世基)가 출자하였다. 초창기의 주필은 최영년(崔永年)이 맡았으며, 기자로는 선우일(鮮于日)·김환(金丸) 등이 종사하였다. 제2대 사장은 친일파의 거두인 송병준이었으며, 1907년 5월 송병준이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자 한석진(韓錫振)이 제3대 사장을 맡았고, 제4대 사장은 최영년으로 폐간될 때까지 맡았다.
경영은 일진회에서 자본과 비용을 부담하였다. 창간 초기에는 지방관청에 강제로 신문을 보내어 지방 발송부수가 7천부까지 이르렀으나, 구독료가 걷히지 않아 재정난에 부닥쳐 창간 5일 만에 1주일 동안 정간하고, 1906년 6월 초순에 다시 일시 정간하였다. 이후 충분한 독자를 확보할 수 없어 근근이 발행되었다.
일제 통감부 정치를 열렬히 지지하는 논진을 펴 『대한매일신문』·『황성신문』과 같은 민족진영의 신문과 격심하게 대립하였으며, 일반 독자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19일에는 친일논조에 불만을 품은 동우회(同友會)와 시위 군중들이 신문사를 습격하여 사옥과 인쇄시설이 모조리 파괴당했다. 그러나 친일 논조는 계속되어 민족지와 여러 차례의 논전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의 베델[Ernest Thomas Bethell, 배설(裴說)]과 양기탁(梁起鐸)이 국채보상금을 함부로 썼다던가, 유길준(兪吉濬)이 이완용으로부터 8천원을 받아 자객을 모집한다는 등 악의에 찬 허위보도를 하는가 하면, 빈번히 오보기사를 게재하여 여러 번 피소되기도 하였다. 역대 사장들의 친일행각은 국민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노골적인 민족 부정적 언론의 표본이었다. 특히 1909년 12월 4일 이용구는 송병준과 더불어 이른바 한일합방상주문(韓日合邦上奏文)을 이완용 내각에 제출하고 이를 공표하는 동시에, 이 신문에 그 성명서를 발표하여 민족진영의 신문인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대한민보』 등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국권 상실 이후 모든 사회단체들이 해산될 때 일진회도 해체되어 시천교(侍天敎)의 기관지로 남아 발간을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1910년 10월 11일 폐간되었다. 현재 이 신문의 복사본(1910년 12월 1일부터 1910년 3월 31일까지의 네 달 분량)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나, 원본의 출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