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진흥왕 6년 기록에 의하면, 545년 가을 7월에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가 왕에게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國史〕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잘·잘못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니, 이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라고 건의하자, 왕이 진실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大阿飡)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편찬하게 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 국사가 편찬되었다.”고 한 것은 국가의 위신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라고 믿어진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신라 중고왕통(中古王統)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위업을 과시하려는 데도 편찬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국사(國史)』의 편찬은 유례없는 영토확장과 체제정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국사』에 기술된 내용 가운데 상당수는 법흥왕 때까지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