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권경완(權景完). 경상남도 창원 출신. 일본 야마가타고등학교[山形高等學校]를 거쳐, 1927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 사상 관계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고, 그 뒤 제삼전선파(第三戰線派)가 주동이 된 잡지 『무산자(無産者)』의 간행에도 관여하였다.
김효식(金孝植)·임화(林和) 등과 손을 잡고 일본에서 프로문학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김기진(金基鎭)·박영희(朴英熙) 등 구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계를 프로예맹에서 축출하고 이른바 소장파를 형성하여 우리 나라 프로문학의 주도권을 잡기도 하였다.
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 등의 기자로 활약하다가 2차에 걸친 카프 검거에 연루되었다. 출옥 뒤에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경성여의전 전신)의 강사,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사서 등의 일을 하였다.
광복 뒤에도 한동안 문학가동맹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월북하지는 않았다. 옥중에서 얻은 폐환(肺患)으로 52살에 마산에서 죽었다. 1930년 8월 『음악과 시』 제1호에 처음 시 「머리를 땅까지 숙일 때까지」를 발표하였고, 1932년 『문학건설』 제1호에 「아버지 김첨지 어서 갑시다! 쇠돌아 갓난아 어서 가자!」 등을 발표하였으나, 예술적 가치보다는 구호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시와 함께 평론에도 손을 대었고 약간의 수필과 소설도 썼으나, 그의 문학은 대체로 목적의식을 강조하고 이념의 노출이 심하여 공감의 폭이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평론도 초기 프로문학이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었다. 그는 철저한 프로문학 신봉자였으면서도 지나친 경직성 때문에 우리 프로문학사에서조차 한 단역으로 처리되고 있다. 저서로는 『자화상(自畵像)』·『윤리(倫理)』·『동결(凍結)』 등 3권의 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