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권상실의 위기를 감지한 당시 지도자들은 국권의 회복을 위한 운동을 다각도로 전개하였으며, 특히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이 같은 교육구국운동에 따라 1906년부터 1910년 말까지 전국에 걸쳐 수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치되었다. 이때 세워진 사립학교 중 하나가 극명학교이다.
이들 사립학교는 동일한 명칭을 가진 학교가 있었는데, 극명학교란 이름을 가진 사립학교도 평안북도 의주의 극명학교를 비롯하여 함경남도 북청의 극명학교(1907), 전라남도 여수의 극명학교(1910) 등 3개교가 있었다.
1907년 평안북도 의주에 설립된 극명학교는 1908년 9월에 고등과와 함께 사범과(師範科)를 개설하여 특히 사립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초등학교 교원 양성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극명학교 사범과는 연령 18세 이상 30세 이하인 자를 입학자격으로 하고, 수업연한은 1년이었다. 극명학교의 사범속성과를 이수하고 1909년 5월에 졸업한 자는 모두 12명이었다.
극명학교는 1910년 8월 현재 고등과와 속성과의 과정을 두었는바, 각 과정의 수업연한은 고등과 3년, 속성과 2년으로 하고, 입학자격은 고등과는 연령 15세 이상 20세 이하로 하고, 속성과는 17세 이상 25세 이하로 하였으며, 입학시험 과목은 고등과는 독서ㆍ작문ㆍ산술로 하고, 속성과는 이과ㆍ일어ㆍ작문ㆍ산술(분수 이내)로 하였다.
독립운동가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은 1910년 만주로 건너가기 전까지 극명사범학교 학감을 지냈다. 1908년 순종이 서순(西巡)할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동반하여 신의주 일대에서 일장기 게양을 독촉하자 김승학은 학생 천여 명을 인솔하고 교사(敎師) 이승근(李承根)ㆍ박형권(朴亨權) 등과 함께 일장기 게양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