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총이 속해 있는 경주노서리고분군은 본래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경주노서리고분군을 포함하여 경주노동리고분군, 경주황남리고분군, 경주황오리고분군, 경주인왕리고분군 등이 2011년 7월 28일 사적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재지정되었다.
금관총은 현재 노서동 고분공원에 발굴된 유지(遺址)가 보존되어 있다. 이 고분은 1921년 9월에 경주시 노서리 현지점에서 가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발견 당시부터 유구의 상당부분이 이미 파괴되어 있었고 정식으로 발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분의 구조나 유물들의 출토상황 등에 관해서는 애매한 점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 현재 금관총의 자리에는 ‘금관총’이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일대를 1963년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노서리 제128호분으로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는 이 고분이 금관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신라유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있는 화려한 금관 일습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발굴당시 봉토는 길이(남-북), 너비(동-서), 높이가 약 36×15×6m 정도가 남아 있어서 원래는 대형고분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래 봉분의 복원규모는 저부 직경 약 45m에 높이는 약 12m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토의 축조수법은 자갈과 흙을 교대로 쌓아 올렸으며, 덧널 바닥은 지반을 깊이 약 40㎝ 정도로 파내고 돌을 깔아 만들었고, 그 위에 세운 덧널(木槨)과 돌무지(積石部)는 모두 지상에 설치되었다. 덧널 바닥에는 두께 약 9㎝ 정도의 판재가 깔려 있었고, 이 판재와 약간의 사이를 두고 일렬로 놓인 석렬이 돌아가고, 판재와 석렬의 사이에는 냇돌(川石)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나무널(木棺) 주위에는 장방형덩이쇠(長方形鐵鋌)가 열을 지어 있었으며, 큰칼 등의 무기가 출토되었고 나무널 안 서쪽에 신발이 있었다고 한다. 나무널은 길이, 너비가 2.5×1.0m인 칠관(漆棺)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내부에서 금관 등의 각종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 이외에도 순금제귀고리, 금제와 은제의 팔찌, 반지 등과 각종구슬, 금제와 은제의 허리띠, 금동제신발 등의 각종 장신구를 비롯하여, 도검, 갑옷(甲胄), 창신(槍身), 쇠화살촉(鐵鏃), 쇠도끼(鐵斧) 등의 무기류와 말안장금구, 말방울, 말띠장식, 교구, 혁대금구 등의 말갖춤류(馬具類), 토기, 목칠기, 유리용기, 쇠솥(鐵釜), 금속제용기, 조개제품 등 많은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곡옥(曲玉)을 포함한 각종 구슬류만도 무려 3만 점이 넘으며 금의 총량만도 7.5㎏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 분산 보관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순금으로 제작된 금관과 허리띠장식일괄품은 각각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금관은 ‘금관총금관’이라는 명칭으로 1962년 국보로, 허리띠장식은 ‘금관총 금제 허리띠’라는 명칭으로 1962년 국보로 각각 지정 보존되어 있다.
금관총의 축조연대는 출토된 유물들에 의거하여 대략 5세기 후반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최근에 이 고분을 자비마립간릉(慈悲麻立干陵)에 비정하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으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다른 견해도 있다.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하던 금관총 장식 대도의 칼집에 '尒斯智王(이사지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을 공개했다. 이어 201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금관총을 다시 발굴하는 과정에서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진 칼집 조각과 일제강점기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물을 여러 점 더 찾아냈다. 이 발굴을 계기로 금관총에 묻힌 인물이 이사지왕이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지만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이 고분의 부장품을 전체적으로 총괄하여 보면, 금제장신구등의 유물들이 많고 무기류가 상대적으로 적은데, 이를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신라가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된 전성기로 들어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증거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금관총은 신라고분 중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그 뒤 신라고분이 무수히 발굴되게 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