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령총이 속해 있는 경주노동리고분군은 본래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경주노동리고분군을 포함하여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 경주황오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 경주인왕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 등이 2011년 7월 28일 사적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재지정되었다.
금령총은 1924년에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에 의하여 발굴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부장품 가운데 특이한 금제 방울이 들어 있어서 ‘금령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고분의 연대는 6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봉토는 발굴되기 전에 이미 크게 파괴되어 남북 길이 약 13m, 높이 약 3m의 반달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원래의 봉분 크기는 바닥 지름 약 18m, 높이 약 4.5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돌무지는 직경 약 9m였으며, 돌무지의 표면은 점토대로 덮여 있었다. 덧널 바닥은 지표 아래 3m에서 나타났는데, 무덤구덩이의 바닥에 냇돌과 자갈을 약 45㎝ 두께로 깔아서 만들었다. 지하에 동-서로 긴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길이, 너비, 높이가 4.8×2.5×1.5m의 상자형덧널(箱子形木槨)을 넣고, 그 안에 길이, 폭이 1.5×0.6m의 나무널(木棺)을 동-서 방향, 머리방향은 동침(東枕)으로 안치하였으며, 나무널의 내면은 특이하게 투조금동판으로 장식하였고, 그 주변에 부장품을 매납하고 있었다. 나무널 안에서는 피장자가 착용하였던 중첩4산형의 금관을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의장세고리자루장식(儀裝三累環頭裝飾)의 나무로 된 큰칼이 출토되었다. 나무널 주위에는 철제이기 등의 각종 유물들이 널려 있었으며, 특히 나무널의 동편 머리맡에는 길이, 너비가 1.8×0.8m의 부장품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여기에 각종 귀금속제용기와 유리용기, 칠기류, 각종 마구, 토기류가 집중되어 있었다.
중요 부장품을 살펴보면, 장신구로는 그림이 그려진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 채양과 관모(冠帽) · 금동제신발 · 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가 있었고, 금동장안장틀〔金銅裝鞍橋〕과 발걸이〔鐙子〕 등 각종 마구 · 금동장고리자루칼 · 금은장소도(金銀裝小刀) 및 각종 철제무기가 출토되었다. 용기류는 금동제합(金銅製盒) · 쇠솥, 각종 그림이 그려진 칠기(漆器), 유리잔 2개가 출토되었다.
각종 토기류 중에는 특히 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 · 배모양 토기 등 특수형 토기와 장식토기가 모두 11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 주인과 종자(從者)를 나타낸 2점의 기마인물형 토기는 조형예술품으로도 훌륭한 것이지만, 당시의 기마풍습 및 마구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장식토기와 특수형 토기는 신라고분 중 단일고분으로는 가장 많고 가장 다양하게 출토된 것이다. 이 밖에 청동제 거울도 1점 출토되었다.
이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금령총 금관, 금제허리띠, 감옥팔찌(嵌玉釧) 등의 장신구를 위시하여 1993년 국보로 지정된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채화칠기, 유리용기 등 많은 유물들이 있었는데, 장신구가 대체로 소형인 점으로 보아 피장자는 나이 어린 왕족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은 1쌍의 기마인물형토기인데, 이것은 정장한 귀족과 그의 종으로 보이는 2개의 토제기마상이다. 이 유물은 피장자의 영혼세계에서의 여행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당시의 조각과 복식자료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