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고구려 때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는데, 757년 경덕왕이 곡양(穀壤)으로 고쳐 율진현(栗津縣)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기에 금주(衿州)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폐하여 수주(樹州)에 예속시켰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설치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416년(태종 16) 금천현으로 하여 현감을 두었다. 세조 때 과천군에 편입되었으나 정조 때 시흥이라 개칭하였다. 금천현은 조선 초기 과천현의 일부를 병합하기 전의 독립된 현이었으므로 그 뒤의 시흥현과는 영역이 다소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삼성산(三聖山)이 진산이었으며, 그곳에 옛 산성이 있었는데, 영랑성(永郎城)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시흥군이 되어 인천부에 속하였다가 다음해 경기도의 한 군이 되었다. 그때에는 읍내와 안양에 행궁(行宮)이 있었고, 충현서원(忠賢書院)이 있었다. 서울의 외곽지역으로 교통상 중요한 몫을 하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