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화인(花人).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 아버지 김종두(金宗斗)와 어머니 황예분(黃禮分) 사이의 외아들이다.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1936년 나고야중학[名古屋中學]을 졸업하였다. 졸업한 그해 귀국하여 마산창신학교(馬山昌信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9년 사임하였다.
1939년 5월 『문장』에 「소연가(召燕歌)」·「고향」 등의 시로 정지용(鄭芝溶)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1939년 다시 도일하여 니혼대학[日本大學] 고사부(高師部) 수신공민과(修身公民科)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귀국하여 1940년 윤계봉(尹桂鳳)과 결혼하였다.
1942년 마산의신유치원(馬山義信幼稚園), 같은 해 4월부터 1946년 8월까지 경성인문중학교(京城人文中學校)·경남여자중학교·동래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광복 후인 1951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文總) 중앙위원이 되고, 계속해서 진해고등학교와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63년 경남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하고, 1964년 한국문인협회 마산지부장을 맡았으며, 1960년부터 1966년까지 경남대학 강사로 출강하였다. 제1시집 『소연가』(1947)는 여인과 꽃을 동일시한 탐미적·낭만적인 미학을 보여주는데, 제2시집 『우수의 황제』(1953)에까지 이러한 화사한 낭만적인 미학이 일관하여 흐르고 있다.
그는 술과 꽃과 여인과 고향을 사랑한 관능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만년에 숙환인 폐병과 신경통이 악화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