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충민사(忠愍祠)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전투(晋州戰鬪)에서 순절한 진주목사(晋州牧使)충무공 김시민(金時敏, 15541592)과 그의 종숙(從叔)으로서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순절한 충숙공 김제갑(金悌甲, 15251592)을 모신 사당이다. 1976년 12월 21일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김시민은 본래 1652년(효종 3)에 진주 충민사(忠愍祠)가 건립되면서 제향되었고 1667년(현종 8)에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경에 훼철되었다. 그 뒤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되었는데 1976년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다. 1978년 정화사업 때 그의 묘소를 충청북도 중원군 살미면 무릉리에서 손자 대부터 거주한 현재의 괴산읍 능촌리로 이장하면서 묘소 아래에 새로이 충민사를 짓고 단독으로 제향하였다.
김시민은 본관이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고,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 병마절도사(嶺南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다. 그 후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었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제갑은 본관이 안동,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이다.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부인 이씨도 순절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역에는 외삼문으로 효충문(效忠門)이 있고, 안으로 들어서서 왼편에 현대에 건립한 신도비 2기가 있는데 왼쪽은 제액(題額)이 ‘김충무공 신도비명(金忠武公神道碑銘)’으로 김시민의 것이다. 1974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권용직(權容稷)이 지었고, 글씨는 김사달(金思達)이 썼다. 오른쪽은 제액이 ‘의재김선생신도비(毅齋金先生神道碑)’로 김제갑의 것이다. 1976년에 건립되었는데 권용직이 지었고, 12대손 김상형(金相馨)이 글씨를 썼다. 오른편에는 ‘김시민장군 유적정화기념비(金時敏將軍遺蹟淨化紀念碑)’가 있어 현대의 묘역 정비 내력을 이해할 수 있다. 이어 내삼문인 선무문(宣武門)이 있고 그 안에 사당인 충민사가 있다. 이는 정면 3칸과 옆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그 뒤편에 묘소가 있다. 묘역 전체의 오른쪽에는 구사당도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