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서천 출생. 동경의 제국음악학교 성악과와 중앙음악학교 기악과를 수료하였다. 1943년 오케음악무용연구소의 음악교사로 재직하였고, 1944년 뮤지컬 형태의 악극「맹강녀」를 작곡·발표하여, 당시의 연예가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45년 오케음반회사 문예부장이던 방예정(方藝汀)과 함께 조선악극단 단원을 보강하여 동양극장 무대에서 악극「카추샤」를 상연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국도극장 개관기념으로 악극「가면무도회」를 작곡, 상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앞서 1945년 12월에는 가극 「춘희(椿姬)」를 오페레타식으로 꾸며 서울시 중구 초동 41번지에 위치했던 수도극장에서 상연해 성공하였다. 수도극장은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재개관하였다가 2005년 철거되었다. 그 뒤 「맹강녀」를 개작해 「도화선(桃花扇)」으로 작품명을 바꾸고, 명동에 있던 시공관에서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중국대사관의 후원을 얻어 중국 경극(京劇)의 협찬을 받은 이색적인 작품이었다.
1947년에 조선악극단에서 독립해 장미악단을 조직, 세미클래식한 악단으로 면목을 일신하였다. 1948년 수도경찰청의 초대경찰악대대장으로 활약하면서, 취주악 발전에 공헌하였다. 6·25사변 때 납북되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일반 대중가요 작곡가와는 달리 대규모의 뮤지컬 중심의 작품 활동을 하였고, 작품은 종래의 악극과는 다른 차원의 본격적인 뮤지컬 형태였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작품으로 「맹강녀」·「카추샤」·「가면무도회」·「춘희」·「도화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