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신촌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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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나주 신촌리 금동관
나주 신촌리 금동관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마한의 독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나주신촌리고분군(羅州新村里古墳群)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산4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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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마한의 독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내용

나주신촌리고분군은 1961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나주대안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 나주덕산리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과 통합되어 2011년 7월 28일 사적 나주반남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것으로 모두 9기가 알려져 있다.

1호분은 신촌리 산 71-3번지에 위치하는 것이다. 성토된 부분은 황갈색의 점토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분구(墳丘)의 남동쪽은 도로 개설시 훼손되고 그 외의 분구 주위는 밭을 개간하면서 규모가 작아졌다. 따라서 분구의 형태가 원형(圓形)인지 방형(方形)인지 조차 구분이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1938년도에 작성된 실측도를 보면 방대형(方臺形)의 고분임이 드러난다. 현존하는 분구의 규모는 장축, 단축, 높이가 12.58×10.38×3.12m이다.

2호분은 신촌리 전 271-2번지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기 마을의 북쪽 살매기골 서쪽의 낮은 구릉상으로 표고 15m의 평탄지대이다. 비교적 분구의 형태가 유지되어 있으나 남쪽의 분구자락에는 2기의 민묘가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남북 20.2m, 높이 4.15m의 분구이다.

3호분은 2호분과 나란히 축조된 것으로 분구가 완전히 훼손되었다. 일부 잔존하는 분구를 통해서 볼 때 규모는 남북이 17.13m, 높이 1.68m인데 일제강점기의 실측도를 보면 원분으로 확인된다. 내부 주체는 독널무덤(甕棺墓)일 가능성이 높다.

5호분은 자미산 북쪽 성내마을 뒷편 구릉에 위치한다. 5호분이 동쪽에, 6호분이 서쪽에 배치되어 분구가 서로 접하고 있는데 5호분은 원분(圓墳)이고 6호분은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5호분은 도굴로 분구의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현 규모는 장축이 20.8m, 높이 4.04m 이다.

6호분은 1939년에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전방후원형의 고분으로 알려져 있던 고분이다. 현재 분구의 규모는 장축이 42.15m, 전방부 너비 25.23m, 후원부 너비 21.63m, 높이 7.1m로서 일제강점기의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발굴 결과 후원부에는 매장시설이 없었으나 전방부에서는 5개의 독널이 발견되었다.

7호분은 신촌리 128-2번지에 위치하는 것이다. 역시 1938년에 조사가 이루어졌다. 분구는 한 변의 길이 20m 남짓한 방대형이다. 정상은 평탄하고 깊이 패인 도굴갱이 있었다. 발굴결과 서쪽의 귀퉁이 언저리에서 1개의 독널이 남북으로 길게 놓인 것이 확인되었다. 독널은 상부는 없어지고 하부만 남기고 있었다. 이 독널의 안쪽에서 중앙 동쪽으로 치우쳐 소형의 납작바닥항아리 1점이 부장되어 있었고, 독널 외부의 남쪽에 손잡이잔 1점이 부장되어 있었다.

9호분은 덕산리 고분군과 같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방대형의 분구는 남북 34.85m, 높이 5.46m이다. 그 결과가 대정 6년도의「고적조사보고서」에 실려 있다. 이 고분은 1917∼1918년에 조사되어 옹관 11기와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環頭大刀) 등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정비복원을 위한 학술조사의 일환으로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분구는 방대형(方臺形)으로 밑변 30.5×27.5m로 성토(盛土) 높이는 4.0m 정도이다. 분구 성토는 여러 가지 흙을 이용하여 교대로 다져 쌓았다.

매장시설은 분구 정상에서 상하 중층으로 확인된 옹관 11기 이외에는 새로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구 정상과 분구 중에서 서로 높이가 다른 원통형토기가 열을 이루며 수립(樹立)되어 있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이 원통형토기(圓筒形土器)는 영산강유역 대형고분에서 확인된 최고(最古)의 예이며, 또한 지금까지 순수한 옹관고분에서 출토된 최초이 예이다. 광주 명화동(明花洞) · 월계동(月桂洞) 장고분(長鼓墳) 등 영산강유역 곳곳에서 원통형토기가 출토되었으나 분구 중에 열을 지어 확인된 것은 처음으로 이 토기의 부장위치 및 기능해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원통형토기는 일본 고분시대의 원통하니와(圓筒埴輪)와 유사한 것으로 장제적(葬制的)인 측면에서 관련이 있어 한 · 일간 고대사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러나 일본열도의 하니와와는 기형, 제작수법, 정면수법 등이 상이하여 하니와에 대한 아이디어만을 차용하여 현지에서 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최고의 예인 신촌리 9호분 출토 원통형토기는 기대에 그릇을 올려놓은 사실적 의기(儀器)이지만 이후의 횡혈식석실과 공반된 원통형토기는 형태가 추상화되어 있어 형식적으로도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주구(周溝)는 분구 사방으로 돌고 있으나 웅덩이 모양으로 각 변에 2∼4곳씩 파여 있다. 분구의 고대화(高大化), 채토처(採土處)로서의 기능적인 성격이 가장 중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옹관의 상하 중층 매납과 함께 분구 토층, 원통형토기의 배치상태로 확인한 결과 분구는 한 번 이상 수직 확장된 것을 알 수 있어 이 지역 옹관고분의 축조특징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신촌리 9호분은 기왕에 조사된 금동관 등 중요유물 이외에 1999년 확인된 원통형토기열 및 추가성토 등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분이다.

참고문헌

『나주 신촌리 9호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나주 반남 고분군』(서성훈·성낙준, 광주박물관, 1988)
「羅州潘南面古墳群」(穴澤和光·馬目順一, 『古代學硏究』70, 1973)
『昭和十三年度古蹟調査報告』(有光敎一·澤俊一, 朝鮮總督府, 1940)
『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谷井濟一, 朝鮮總督府,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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