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1894년)은 근대화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는 했으나 주체적 개혁이기보다는 타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학제도 제도상의 개혁에 머물렀다. 따라서, 많은 민간인 선각자들은 사립학교를 세워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 치열한 국제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당시 민간인에 의해서 설립된 사학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공동이념으로 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졸업 후 학생들은 애국적 민족운동의 지도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흥화학교(興化學校)ㆍ낙연의숙(洛淵義塾)ㆍ오산학교(五山學校)ㆍ현산학교(峴山學校)ㆍ보성학교(普成學校)ㆍ대성학교(大成學校) 등은 그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었다.
낙연의숙도 민간교육기관 중 하나로 일어와 보통학과를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교사양성을 위한 사범과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새로운 지식을 계발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항일 구국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 뒤 보광학교(普光學校)로 교명을 바꾸어 운영하다가 1916년에 폐교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어를 가리키는 교육기관은 1891년 5월, 정부에 의하여 한성에 설립된 관립「일어학당」이 효시가 되고, 인천일어학교, 1908년 1월의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을미의숙 정도였다. 을미의숙은 형식상은 사립학교였지만, 재정적으로는 사실상 관립학교였다. 이처럼 초기의 일어학교는 관주도에 의해 한성(서울)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1896년부터 98년에 걸쳐서는 경성학당, 호서학당과 같은 일본인의 단체 혹은 개인이 설립한 일어학교가 주로 서울 이남 지역에 들어서게 되며, 1899년에는 평양에 평양일어학교 등이 들어섰다. 이어서 순수하게 민간 한국인 유지에 의한 일본어 교육기관인 낙연의숙, 한양학교 등이 속속 등장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