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예족사회는 부족연맹체 단계의 정치적 성장을 이룩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런데 동방사회의 영도세력의 위치에 있던 위만조선으로부터 상당한 간섭을 받고 있던 처지였으므로, 위만조선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서기전 128년에 휘하의 28만인과 함께 한(漢)에 투항하였다. 그래서 한나라가 이 지역에 창해군(蒼海郡, 滄海郡)을 설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사기』·『한서』 등의 문헌에서는 그를 ‘예군(穢君: 濊君)’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예족의 족장’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 위만조선이나 한으로부터 수여된 칭호라 생각된다.
이 예군 남려(南閭)에 대해서는 요동군(遼東郡) 인근 지역의 예족 부락의 군장(君長)으로 보거나 혹은 집안 지역에 중심을 두고 압록강 본류 유역 일대의 대수맥(大水貊)과 혼강(渾江) 유역의 소수맥(小水貊)을 아우른 대부족 연맹체의 장으로 보는 견해, 동해안 함흥 일대를 본거지로 하는 예의 군장으로 보는 견해, 부여 왕으로 비정하는 견해 등이 있다.
한편 예족사회의 위치에 대해서는 안정복(安鼎福)의 강릉설(江陵說), 유득공(柳得恭)의 춘천설(春川說), 이마니시(今西龍)의 함흥(咸興) 또는 정평설(定平說), 이케우치(池內宏)의 영흥설(永興說) 등 여러 설이 있다.
예군 남려가 이끌고 투항한 28만 인은 강력하게 통합된 지속성을 지닌 정치체라기보다는 한과 위만조선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이해를 같이한 주민집단들의 완만한 연합체로 여겨진다. 또한 이들 지역에 설치한 창해군의 경우 설치 후 인력과 경비 부담의 문제로 인해 3년 뒤에 폐지되었다가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07년에 이 지역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