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고구려의 당성군(唐城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고, 흥덕왕 때 군을 폐하고 진(鎭)을 두었다. 고려 초기에 다시 당성군으로 하였고, 1018년(현종 9)수주(水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인주(仁州)에 이속하였다. 1172년(명종 2)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1290년(충렬왕 16) 읍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원나라에 가서 정동행성우승(征東行省右丞)이 된 관계로 이곳 수령을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시켰는데, 뒤에 다시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로, 또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시켰다. 1310년(충선왕 2) 모든 목(牧)을 없앨 때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로 격하되었다.
1413년(태종 13) 그대로 남양도호부가 되고 재양현(載陽縣)이 속현으로 붙게 되었다. 1644년(인조 22) 현(縣)으로 격하되었다가 1653년(효종 4) 복구되고, 헌종 때에도 승격과 격하가 되풀이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 때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 실시 때 경기도의 4등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군이 해체되어 영흥면(靈興面)ㆍ대부면(大阜面)은 부평군(富平郡)에, 나머지 전역은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편입되어 남양면이 되었다. 1949년수원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수원군이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