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5월에 발견되었고, 지표채집되어 신고된 유물인 꾸미개〔裝身具〕·청동거울〔銅鏡〕·무기·말갖춤〔馬具〕·토기 등 유물은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산강 발원지의 하나인 오래천 천변에 있으며, 서봉마을 뒷산 표고 약 20m 남짓한 나지막한 야산 경사면에 자리한다. 유물은 토기와 석기류가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완형 1점밖에 출토되지 않았다. 석기류는 돌도끼〔石斧〕, 돌끌〔石鑿〕, 홈자귀〔有溝石斧〕, 간돌검〔磨製石劍〕,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돌칼〔石刀〕, 공이〔敲石〕, 둥근돌〔環石〕, 숫돌〔砥石〕 등 모두 70여 점이 수습되었다. 특히 석기류 가운데 미완성인 석기원료가 상당량 수습되어 주목된다. 간돌검은 피홈〔血溝〕이 있는 슴베있는 것〔有莖式〕으로 우리나라 서북지방의 대표적인 간돌검이어서 서해안을 따라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간돌화살촉은 슴베있는 것과 슴베없는 것(無莖式)이 섞여 있다.
분묘의 축조상태를 살펴보면, 남북 길이 189㎝, 동서 너비 172㎝, 깊이 20∼30㎝의 얕은 움〔土壙〕을 파고, 동서 양벽 어깨 위에만 30∼40㎝ 정도 크기의 부정형의 깬돌을 한 단 놓았을 뿐 다른 시설은 일체 없었다.
따라서, 덮개〔天蓋〕는 나무를 옆으로 걸쳐놓고 흙을 덮은 형식으로 추정된다. 이는 움무덤〔土壙墓〕의 일종으로, 움이 정장방형에 가까운 구조를 하고 있는 점이 특이다. 바닥은 생토(生土)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진 움무덤이 전라남도 나주군 다도면 마산리 2구 쟁기머리에서 3기가 발견되었는데, 보고자는 이러한 형식을 위석식묘(圍石式墓)로 분류하였다. 부장품은 항아리 1점, 금동제가는고리귀걸이〔金銅製細鐶耳飾〕1쌍, 굽은옥〔曲玉〕1점, 유리구슬 4점, 반지〔指鐶〕1쌍, 철창과 뚜껑접시〔蓋杯〕4점, 청동거울 2점, 철제긴칼〔鐵製大刀〕1점, 손칼〔小刀〕1점, 말갖춤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 중 뚜껑접시에는 경질과 연질이 포함되어 있다. 뚜껑을 받는 부분은 각진 것과 곡선으로 된 것의 두 종류가 있어 백제토기의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예는 논산 육곡리(六谷里)·표정리(表井里)·신흥리(新興里) 등지의 돌방무덤〔石室墳〕및 전주 부근의 출토품 등 몇 점이 알려져 있다.
납작밑짧은목단지〔平底短頸壺〕는 청회색의 병형(甁形) 토기로 높이 16.7㎝, 아가리 지름 8.5㎝, 바닥 지름 8.8㎝, 몸체〔胴部〕 최대 지름 16.2㎝이다.
특징은 아가리〔口緣〕와 짧은 목에 있는데 아가리는 중국자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이다. 뚜껑접시와 짝을 이뤄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백제에서의 성행시기와 용도에 있어 이 두 종류의 친연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철제발걸이〔鐵製鐙子〕는 둥근발걸이〔輪鐙子〕형식이다. 기타 말갖춤으로는 재갈이 있다. 재갈은 재갈쇠·재갈멈추개·고삐이음쇠 등 세 부분이 모두 잘 남아 있다. 무구(武具)로서는 길이 81㎝의 철제긴칼과 27㎝의 손칼이 있다.
다른 주요유물로는 변형육수경(變形六獸鏡)과 백유경(百乳鏡)의 청동거울 2점이 있다. 변형육수경은 지름 11.4㎝, 두께 2.5㎜로 진주·양산과 경주 황오동고분(皇吾洞古墳)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백유경은 지름 9㎝, 두께 2.5㎜로 금령총(金鈴塚)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중국 육조경(六朝鏡)을 모방한 이른바 본뜬거울〔倣製鏡〕은 우리 나라에서보다 일본에서 다량 출토되기 때문에 배에 실려온 것〔舶來品〕이 아닌가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장신구로서는 금동제반지·가는고리귀걸이·굽은옥, 그리고 구슬이 약간 있으나 모두 소형이고 빈약한 것들이다.
이 고분의 연대는 뚜껑접시, 납작바닥의 짧은목단지 및 방제경으로 미뤄볼 때, 6세기 이후에서 7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른바 위석식묘는 일종의 변형움무덤〔變形土壙墓〕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분은 석비레층이나 점토층이 없는 지역에서는 낮은 토벽 위에 1단의 돌을 놓음으로써 적당한 벽체를 유지하고, 또한 뚜껑시설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이 고분은 지면에 간단히 돌을 둘러놓고 흙을 덮은 위석식묘와는 기원에서 차이가 있는 보다 발전된 형식이다. 이 분묘형식은 4기만 발견되었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광범하게 채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