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제11대 왕 대이진(大彛震)의 동생이다. 연호와 시호는 전하지 않으며, 당시의 내치(內治)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단지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外治)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당나라와의 교섭은 당나라 내부의 농민폭동과 관련하여 빈번하지 못하였던 데 반하여, 일본과의 교섭은 계속되었다. 858년 겨울 정당성 좌윤(政堂省左允) 오효신(烏孝愼) 등 104인을 일본에 보냈으며, 860년에도 이거정(李居正) 등 105인을 일본에 보냈는데, 그 목적은 주로 신라에 대한 견제와 경제적 이해관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841년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첩(牒)에는 대건황(大虔晃)을 ‘중대친공 대내상 전중령(中臺親公大內相殿中令)’의 관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좌우상(左右相)의 윗자리인 정당성의 대내상(大內相)을『문원영화(文苑英華)』에 등장하는 부왕(副王)과 연결시켜 대건황을 부왕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왕이라는 용어는 『신당서(新唐書)』와『문원영화』에서만 보인다. 『문원영화』의 기록은 앞뒤를 살펴볼 때 발해의 대이진과 당의 문종(文宗)이 동시에 존재하던 830∼840년 사이의 기록이며, 『신당서』의 기록 역시 그 저본이 된 『발해국기(渤海國記)』의 작성시점을 감안해 볼 때 834년, 즉 대이진 재위 초기의 기록이므로 이때의 부왕은 대이진의 장자(長子)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발해의 왕위계승 역시 적자손계승(嫡子孫繼承)이 원칙이었으나 적장자가 없을 경우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왕이라고 표현하던 대이진의 장자가 있었으나 일찍 사망함에 따라 당시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이진의 동생 대건황이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