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내당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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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칼달린세잎고리자루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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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대구광역시 서구에 있었던 삼국시대 신라의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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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구광역시 서구에 있었던 삼국시대 신라의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비교적 초기에 축성된 토성인 대구 달성(達成)에서 남서로 뻗은 나지막한 구릉들에는 일제강점기에만 하더라도 87기의 삼국시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이것이 달서 고분군이라 불리는 것으로 지금은 대구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이곳에 민가들이 들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고분군은 크게 5개의 군집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가운데 남동의 남서에서 북동으로 길게 뻗는 구릉에 존재했던 제2군집의 일부와 4군집, 5군집이 대구 내당동에 해당되어 내당동 고분군으로, 나머지는 비산동 고분군(飛山洞 古墳群)으로 불리고 있다. 내당동 고분군에 속한 고분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봉토분이 모두 38기(50∼87호)인데, 고분들 가운데 5기가 1923년소천현부(小泉顯夫) 등에 의해서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된 고분은 50·51·55·59·62호 등이다.

내용

50호분은 하나의 봉분내에 주부곽식인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 1기가 들어 있던 한사람무덤(單葬墳)이다. 봉토는 원형이었고 직경이 19.7m, 높이가 4.2m이다. 장방형의 으뜸덧널(主槨)과 장방형의 딸린덧널(副槨)은 서로 장축이 교차되게 ‘정(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으뜸덧널은 장축이 북동-남서 방향이고 크기는 길이, 너비, 깊이가 3.9×1.2×1.7m이다. 네 벽은 냇돌로 쌓았는데 돌 사이에 볏짚을 섞은 진흙으로 메우고 벽면 전체를 진흙으로 발랐다. 판석 4매로 뚜껑을 하였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밀봉하였다. 바닥에는 10㎝ 가량 자갈을 깔았으며 중앙 4곳에 크고 넓적한 냇돌을 놓아 덧널받침을 마련하였다. 꺾쇠의 출토 상태로 보아 돌덧널의 중앙에 나무덧널(木槨)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딸린덧널은 장축이 남동-북서 방향이고 크기는 3.58×0.68×1.7m이다. 축조 수법은 으뜸덧널과 유사하고, 여기에도 9매의 판석을 덮었다. 딸린덧널의 양 단벽측에만 유물이 많이 매납되었고 중앙부는 비어 있었으며 여기에서 2점의 쇠손칼(鐵刀子)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순장자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51호분은 하나의 분구내에 2기의 돌덧널이 ‘정’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봉토는 크기가 남북직경 21.2m, 동서직경 16.7m, 높이 4m의 타원형이다. 보고서의 봉토 실측도에는 2개의 돌덧널이 동남측에 치우쳐 배치된 점으로 보아 북서측에도 다른 무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고분은 하나의 봉토에 여러 개의 덧널을 배치한 무덤(多葬墳)이 된다. 따라서 발견된 2개의 돌덧널 관계는 제1돌덧널(小石槨)이 제2돌덧널(主石槨) 보다 늦게 제2돌덧널의 봉토에 덧붙여서 축조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제2돌덧널은 장축을 동-서로 하였고 크기는 4.62×1.03×1.7m이다. 네 벽은 냇돌을 쌓아 축조하였고, 돌 사이에는 볏짚을 섞은 진흙을 다지고 벽면 전체를 진흙으로 발랐다. 바닥에는 10㎝미만 되게 잘게 깬돌을 깔았다. 뚜껑으로는 5매의 판석을 사용하였다. 꺾쇠의 출토 위치로 보아 나무덧널(木槨)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제1돌덧널은 장축을 남-북으로 두었으며 3.03×0.91×0.91m의 크기이다. 네 벽은 편마암 및 이판암의 깬돌을 위가 좁아지게 쌓았다.

55호분은 하나의 봉분에 1기의 앞트기식돌덧널(橫口式石槨)이 들어 있는 한 사람무덤(單獨墳)이다. 봉토는 직경, 높이가 18×3.9m인 원형이다. 돌덧널은 장축이 동북-서남 방향이고 크기는 4.5×1.67×2.0m이다. 돌덧널의 양측 벽은 큰 판석을 세워서 만들었으며, 판석과 판석 사이에는 냇돌로 막고 그 위를 진흙으로 발랐다. 안쪽의 벽은 냇돌을 2단으로 쌓고 그 위에 판석을 세웠다. 입구는 아래에 냇돌을 2단으로 쌓고 그 위에 판석을 세워 막았다. 바닥에는 직경 7-8㎝ 정도의 깬돌을 깔았다. 위에는 3매의 판석으로 뚜껑을 하였다. 꺾쇠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나무덧널(木槨)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유물 출토 상태로 보아 원피장자(原被葬者) 외에 1인이 추가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59호분은 남북 약 24m, 동서 약 30m, 높이 약 3.6m의 타원형 봉토인데 남동에서 1기의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 북서에서 1기의 앞트기식돌덧널(橫口式石槨)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표형분(瓢形墳)이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남동쪽에 위치한 구덩식돌덧널만 보고되었다. 돌덧널은 장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하였고 크기는 5.0×1.5×1.77m이다. 바닥에는 10㎝ 미만의 두께로 잘게 깬돌을 깔았다. 서남벽은 먼저 판석을 횡으로 세우고 그 위에 냇돌과 깬돌을 섞어 쌓았으며 다른 벽들은 처음부터 냇돌(川石)과 깬돌(割石)을 섞어 쌓았다. 돌 사이에는 볏짚을 섞은 진흙으로 메우고 벽면전체를 진흙으로 발랐다. 판석 5매로 뚜껑을 하고 사이에는 냇돌을 채웠다. 그 위에 6㎝ 두께로 진흙을 덮어 밀봉하였다. 돌덧널 전면에서 꺾쇠가 출토되어 나무덧널(木槨)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으나 도굴로 인하여 대부분의 유물이 없어지고 교란도 심하여 유물의 매납 상태를 짐작할 수 없다.

62호분은 원래 주부곽식으로 추정되나 봉토와 으뜸덧널부가 파괴 유실되어 딸린덧널로 추정되는 돌덧널만 조사되었다. 돌덧널은 장축을 동남-서북 방향으로 취하였고 크기는 2.0×1.17×0.66m이다. 4벽은 냇돌로 쌓았고 위에 판석 수 매로 뚜껑을 하였다. 바닥에는 잘게 깬돌을 10㎝정도 깔았다.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 금동제관모(金銅製冠帽), 은제 또는 금동제 조익형관식(鳥翼形冠飾), 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 금제가는고리귀고리(金製細環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帶), 금동제신발(金銅製飾履) 등의 장신구와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 쇠투겁창(鐵矛), 쇠화살촉(鐵鏃),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등의 이기류(利器類), 금동제의 안장(鞍橋), 말띠드리개(杏葉), 말띠꾸미개(雲珠),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 청동잔(靑銅杯)을 비롯한 금속제용기류, 다종다양한 토기류가 있다. 무덤의 구조나 출토유물로 보아 5∼6세기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당시 대구지역에 자리잡았던 최고지배집단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新羅文化論攷』(齋藤忠, 吉川弘文館, 1973)
『大正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小泉顯夫·野守健, 朝鮮總督府,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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