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의 관찰사로 있던 이충구(李忠求)는 민지 계발에 있어서 제1의 급선무는 여자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일이라고 보아 1907년 8월 대구에 여성교육기관으로 양성여학교를 설립하고, 운영에 필요한 학교경비를 모두 부담하였다.
대구양성여학교는 일본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의 초등학교에 교사로 있던 일본인 서산웅조(西山熊助)의 부인을 교사로 삼아 학생들을 교육하도록 하였는 바, 개교시의 학생수는 30여 명에 달하였다. 1907년 12월에는 본교의 학생수가 50여 명에 달하였고, 교사로는 서산씨 부인 외에 국문교사로 유(柳)부인 난파(蘭坡) 등 2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