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거주 동포의 교육진흥을 목표로 1907년 3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족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그해 10월 3일 기관지로 창간하였다.
초대사장은 문양목(文讓穆), 주필은 최영만(崔英萬)이었다. 처음에는 석판인쇄(石版印刷)로 발행되다가, 1907년 11월 21일자부터는 국문활자로 제작되었다.
재정난으로 1908년 4월 9일자 제25호로써 휴간하였으나, 다시 복간하여 1909년 1월 23일자까지 발간되었다. 원래는 주간으로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운영난으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보급소는 미국 내 14개소와 우리나라에 11개소, 중국 상해(上海)에도 1개소를 두었다. 교민들의 상부상조와 본국의 국권회복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국내에도 보급되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908년 4월 일제가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을 보강함으로써, 해외에서 발간하는 신문도 발매·반포의 금지 또는 압수를 당하게 되자, 국내반입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뒤 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가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國民會)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새출발하게 됨으로써, 기관지 『대동공보』는 1909년 2월 10일 창간된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에 흡수,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