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25일 서울 북창동에서 이종형(李鍾滎)이 창간하였다. 부사장 이봉구(李鳳九), 주필 황석우(黃錫禹)·김옥근(金玉斤), 편집국장 최원식(崔瑗植) 등의 진용으로 출발하였다.
그 뒤 사장 이선근(李瑄根), 편집국장 강영수(姜永壽)로 바뀌었다. 창간 당시 좌파 신문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가운데 공산당과 그 동조자들에게 공격을 가하던 극우지(極右紙)로서, 1946년 1월 7일 극단적인 반좌익과 신탁통치반대의 논조로 좌파청년들에게 습격당하여 5일 동안 휴간하였다. 같은 해 3월 18일 주간 『청년신문(靑年新聞)』, 3월 12일 일간 『가정신문(家庭新聞)』을 자매지로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5월 16일자 여운형피습사건(呂運亨被襲事件)을 긍정적으로 보도한 기사가 문제되어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최초로 발행정지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46년 9월 25일 서울시내 신문사 종업원들의 파업으로 인하여 임시휴간하였다가 10월 2일부터 다시 속간하였다.
이 신문은 극우지로서 사주 개인의 감정발산이 두드러졌고, 선전전단 같은 인상을 주는 등 언론계의 이단자적인 존재였다는 평가도 받았다.
1947년 제호를 『대동신문(大同新聞)』으로 바꾸었으며, 1954년 12월 12일 공보부로부터 계속발행불능처분을 받았으나 소송으로 승소하였다. 그러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1957년 4월 15일 지령 제2131호로 『한국경제신문(韓國經濟新聞)』으로 개제,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