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조선 후기 지리학자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하였다. 김정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1804년(순조 4)경에 태어나 1866년(고종 3)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양한 지도 제작에 힘을 기울였으며, 국토 정보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지리지 편찬에도 매진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 『청구도(靑邱圖)』와 『동여도(東輿圖)』,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이 있다.
22첩이며, 표제는 ‘대동여지도’이다. 현재 국내외에 30여 점의 『대동여지도』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중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주1과 서울역사박물관 주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주3가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의 판목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1매, 국립중앙박물관에 11매가 남아 있어 흥선대원군이 지도의 목판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대동여지도』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가지고 다니거나 볼 수 있도록, 기존의 지도책 형태가 아니라 주4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으로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을 첩의 형태로 하였다. 지도를 접었을 때의 첩 크기는 가로 20㎝, 세로 30㎝이다.
최근의 연구를 참고하면,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하거나 백두산을 오르내리면서 국토를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거의 없다. 이는 전통시대 지도 제작의 방법과 근대적 지도 제작의 방법을 구분하지 못한 데에서 나오는 오해이다. 선조들의 전통적인 지도 제작 방식으로 전 국토를 측량하여 우리나라의 전도를 그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도 못한 김정호라는 개인 한 사람이 전국을 답사하여 『대동여지도』와 같은 정밀한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대동여지도』는 당시까지 쌓여 온 조선 지도학의 성과들을 흡수하고 이를 종합하여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대동여지도』의 간행 경위를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조선 조정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지도와 서적들을 신헌(申櫶)이라는 고위 관료의 도움으로 열람할 수 있었고, 또한 서양 학문에 정통한 친구 최한기(崔漢綺)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과학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먼저 1834년(순조 34)에 지도책 『청구도(靑邱圖)』를 만들었다. 같은 해에 그는 최한기의 부탁을 받고 서구식 세계지도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의 목판을 판각하였다. 아울러 우리의 국토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동여도지(東輿圖志)』와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와 같은 방대한 지리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쌓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김정호는 1861년(철종 12),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대동여지도』는 주5 방안을 사용하였다. 방안의 크기는 2.5㎝로 일치한다. 실제의 10리 거리를 지도상에 2.5㎝로 축소한 것인데, 정확한 축척을 계산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 『대동여지도』는 현대 지도와 같이 근대적 측량에 기대어 투영법을 적용한 지도가 아니다. 또한 지역마다 정확도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도엽을 균등하게 10리[현재의 2.5㎝]로 축소해서 그렸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실제 도면을 기준으로 정확한 축척을 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처럼 기본적으로 경위선표(經緯線表)를 기초로 하여 제작하였다. 이때의 경위선은 현대의 경위도 개념이 아니고, 평면 위에 그린 방격을 말한다. 한반도를 남북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은 주6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층을 동서 주7로 구분하여 접을 수 있게 하였다. 즉, 각 층을 책의 크기로 접은 판의 크기는 동서 80리, 남북 120리가 된다. 남북이 22층이고 각 층의 길이가 120리가 되므로, 전체 남북의 길이는 주8가 된다. 『청구도』의 주9보다 주10가 줄어든 수치이다. 이는 목판 절약을 위하여 남해안과 제주도 사이에 있는 바다 공간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였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하였지만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판각의 편리를 고려하여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 가운데 중요도가 낮은 지명들을 뺐으나, 그래도 1만 3000여 개의 지명을 수록하여 조선시대의 목판본 지도로는 가장 많은 지명을 수록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후대에 만들었지만, 목판본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필사본인 『청구도』보다는 내용이 조금 적다. 하천과 누정, 진보(鎭堡), 포, 부곡, 교, 평주, 목장, ‘이(里)’ 항목 정도가 『청구도』보다 많고, 나머지 항목들은 내용을 적게 수록하였다.
김정호는 지도에 수록한 중요 항목을 지도표라는 기호식 표현 방식으로 제시하였는데, 전체 14항목이다. 14항목은 영아(營衙)와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 역참(驛站),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 등이다. 『대동여지도』에는 누정과 사찰, 사원(祠院) 등 문화적 요소들도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지도표에 수록한 것은 위의 항목뿐이다. 이들 항목은 국가의 행정과 군사, 재정과 관련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긴요한 사항들이다. 특히 성지와 진보, 봉수, 산성과 같은 군사적 항목의 비중이 높은 것은, 『대동여지도』가 행정적 용도보다는 국방의 필요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김정호가 신헌과 같은 고위 무관의 후원을 받은 점과, 『대동여지도』의 「지도유설」과 『동여도』의 여백에 쓰인 군사와 관련한 주기(注記)는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는 수록 내용 면에서 거의 일치하지만, 표현 기법에서는 『대동여지도』가 보다 더 정교한 느낌을 준다. 『대동여지도』는 조선의 전통적 산천 인식을 반영하여, 산지를 독립된 산의 형태가 아니라 이어진 산줄기로 표현하고 있다. 이 점은 『동여도』와 비슷하나, 가장 큰 차이는 산지의 험준함과 산줄기의 폭, 높이 등을 반영하였다는 것이다. 『동여도』는 산줄기의 험준함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고 표현하여, 동부의 험준한 산지나 서해 연안의 낮은 구릉성 산지를 모두 같은 굵기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산지의 형세에 따라 표현한 산줄기의 굵기가 다르고, 산줄기가 모이고 갈라지는 지점과 높은 산이 있는 곳은 크게 그려 강조하였다. 『대동여지도』의 산지 표현 방법은 외국의 고지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나라 전통 지도학의 특징으로 평가받아 왔다. 산맥 위주의 지형 표현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산맥 표시, 삼태기 모양의 지형과 취락의 주산 표시 등은 풍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천은 쌍선과 단선을 섞어서 그렸다. 넓은 하구에서 차츰 좁아져 가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단선으로 바뀌어 골짜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강폭을 기준으로 삼는 현대 지도의 수계 표현 방식과도 비슷하다. 이 또한 『동여도』와는 다른 표현 방식이다. 여기에서 쌍선에서 단선으로 바뀌는 기준은 몇 가지 근거를 종합해서 볼 때, 당시 하구에서 배가 올라와 운항할 수 있는 가항(可航) 여부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서울에서 전국 각지로 뻗어 나간 도로망을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국토의 구석에 있는 고을까지 빠짐없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곡선으로 표현한 물줄기와 구분하기 위해 도로망을 직선으로 그려 놓았는데,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현대 지도처럼 축척으로 계산하지 않아도, 찍혀진 점의 개수를 세면 두 지점까지의 거리를 쉽게 알 수 있다. 아울러 도로를 따라 위치한 역원과 같은 편의시설도 상세히 표시해 놓아, 여행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대동여지도』는 19세기 당시 기준으로는 조선 지도학의 최고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밀한 경위도 측량이나 거리, 방위 측정 등의 측량 기술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대 지도와 비교하였을 때 오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예들 들면 현대 지도와 비교하여 북부 지방, 특히 함경도 지방에서 큰 오차가 발견된다. 이러한 오차가 발생한 이유는, 이 지역이 중앙과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변방이라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인식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여지도』는 최첨단 과학기술로 제작된 현대 지도와 비교해 보아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북부 지방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현대 지도의 한반도 윤곽과 거의 일치한다. 근대적 측량 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작된 지도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로 인해 1910년대 일본이 조선을 식민 통치하기 위해 토지를 조사할 때에도 『대동여지도』를 기초 지도로 활용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