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발해는 1116년(예종 11) 고영창(高永昌)이 건국한 발해(渤海)의 부흥 국가이다. 발해 멸망 후 190년이 지난 1116년에 거란(契丹)에 협조하던 발해 지배층 유민인 고영창에 의해 건국되었다. 거란에 반기를 들고 세워진 대발해는 융기(隆基, 또는 응순(應順))로 원년을 칭하였다. 국가 체제의 미흡, 금에 대한 외교 실패, 다른 지역의 발해 유민 대표 및 요동 지역 이민족들과의 연합 실패, 발해계 내부의 공동체 의식의 약화 등으로 5개월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대발해는 발해 멸망 후 190년이 지난 1116년(예종 11)에 거란(契丹)에 협조하던 발해 지배층 유민인 고영창(高永昌)에 의해 건국되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대원(大元)’이라고 전한다. 요(遼)나라에 반기를 들고 세워진 대발해(大渤海)는 융기(隆基, 또는 응순(應順))로 원년을 칭하고 처음에는 기세를 올렸으나, 5개월만에 단명한 왕조에 그쳤다.
대발해가 건국될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1114년(예종 9) 여진(女眞)의 아골타(阿骨打)가 거란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1115년(예종 10) 황룡부(黃龍府: 지금의 길림성 농안)를 무너뜨리고, 거란의 천조제(天祚帝)의 친정군을 물리침으로써 동북방의 대세가 여진에게로 넘어갔다. 신흥 여진은 계속 거란을 압박하는 가운데 1115년 정월 금을 건국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거란의 각지에서는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듯 거란국이 여진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어 갈 무렵, 거란 황제 천조제로부터 고영창이 발해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 2천을 모집해 요양부(遼陽府) 부근의 백초곡(白草谷)에서 아골타 무리를 지키도록 명령을 받았으며, 이것이 발해 부흥 왕조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요의 동경유수(東京留守)인 소보선(蕭保先)은 발해 유민에게 과중한 조세 징수 및 가혹한 수탈과 착취, 심한 악형을 행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발해 유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영창은 소보선에 대해 반감을 가진 발해 유민들을 선동해 1116년 정월에 발해병 8천 명으로 동경 용양부를 점령하고 스스로가 ‘대발해국’ 황제에 즉위하였다.
나라를 세운 지 10여 일만에 거란 동경도 산하의 79주 가운데 50여 주를 지배하는 위력을 떨쳤으며, 귀덕주(貴德州: 鐵嶺市 동남)의 거란 장수 야율여도(耶律余賭)조차 광주(廣州)에서 이 거사에 굴복하는 형세였다.
고영창은 한때 거란과 심주(瀋州: 지금의 심양(瀋陽))에서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신흥국인 금나라의 황제 아골타에게 사신을 보내 거란에 대한 협공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나라가 대발해와의 연합 조건으로 요동의 점거 및 황제 칭호의 철회를 내세우자 그는 황제를 고집하는 한편 오히려 금에 억류되어 있는 발해인의 송환을 요구하는 등 경직된 협상을 벌였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고 오히려 알로(斡魯)를 대장으로 한 금나라 군대에 의해 참살되어, 대발해국은 단명한 왕조에 그치고 말았다.
대발해 부흥운동의 실패 후 동경의 발해 유민들은 금의 지배 정책에 동참해 고위 관직에 오르거나, 고려로 와서 항복하거나, 금의 사민책에 따라 다른 곳으로 사민되었다. 이러한 대발해 부흥운동의 실패 원인으로는 국가 체제의 미흡, 금에 대한 외교 실패, 다른 지역의 발해 유민 대표 및 요동 지역 이민족들과의 연합 실패, 발해계 내부의 공동체 의식의 약화와 변화 등을 들 수 있다.
대발해의 봉기가 실패하면서 발해 유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려에 와서 항복하였는데, 『고려사』에는 여전히 발해인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발해가 멸망한 지 200년 가까이 지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발해’라는 국호에서 보듯 여전히 발해 계승 의식이 존속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거란 내 발해 유민들의 역사 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고려 또한 고려로 넘어오는 이들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는데, 이는 고려 초 이래 발해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음을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