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6월 5일 만주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대한국민회장(大韓國民會長) 구춘선(具春先)과 이익찬(李翼燦)·윤준희(尹駿熙)·방원성(方遠成) 등이 주간 신문으로 창간하였다. 영국인 마틴(Martin)이 경영하는 제창병원(濟昌病院)의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등사판으로 만들었다.
등사판으로 만든 신문이어서 조판이 따로 없고, 지면형태는 단수를 구분하지 않은 1단제로 되어 있다. 보통신문보다 작은 크기로 되었으며, 제호는 이중음각(二重陰刻)으로 그려 지면의 상단에서 하단까지 이어졌다.
1919년 6월 5일의 「근고해외동포형제(謹告海外同胞兄弟)」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정의인도(正義人道)를 무시하는 저 무도막지한 원수의 총검에 맞고 찔려 목숨을 희생한 이가 기만(幾萬)이며, 부상한 이가 기십만이며, 감옥중에 피수(被囚)된 이가 기백만인지 기수(其數)를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경술수치(庚戌羞恥)를……주혈복익(注血伏翼)하나이다.”라고 일제의 잔학상을 통박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였다.
또한, 오늘날의 외신란에 해당하는 「내외전서구(內外傳書鳩)」를 두어 해외 각지의 독립지사들의 활동상황과 외국의 움직임 등을 보도하였다. 1920년 6월 5일자 제17호까지 발간되었으나, 그 후 몇 호까지 계속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