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겸(石鎌)’이라고도 한다. 날은 양쪽에서 마연하였는데 안쪽으로 조금 휘어져 들어가 있어 몸쪽으로 끌어당기듯이 수확물을 베어내는데 알맞다. 날의 반대쪽은 앞쪽 끝부분으로 가면서 아래쪽으로 휘어지고, 자루가 착장되는 부분은 단면 장방형을 이룬다. 길이는 20∼25㎝ 정도로 반달돌칼에 비해 대형이지만 두께는 1㎝ 정도로 얇다.
신석기시대의 돌낫은 봉산 지탑리 2지구, 서울 암사동 4호 집터 등 신석기 중기의 유적에서 출토된다. 각기 약간 죽은 장방형으로 등과 날도 같은 방향으로 약간 휘어 있다. 이들 유적 외에는 돌낫의 출토 예가 없기 때문에 신석기시대의 수확구는 뼈낫이나 맨손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신석기시대에는 반달칼이 주된 수확구로 쓰였다. 돌낫은 룽산〔龍山〕문화 이후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제작되기 시작해 상·주 이후로는 반달칼 대신 수확구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벼농사를 지은 화남지방에서는 상·주시대에도 돌낫보다는 반달돌칼이 주로 이용되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돌낫은 같은 수확구인 반달돌칼에 비해 출토유적과 수량이 현저하게 적다. 최근 출토된 지역으로는 제천시 능강리, 보성군 동촌리, 경주시 충효동 집터유적을 들 수가 있다. 또한 낫이 출토되는 유적에서도 반달돌칼이 공반되고 있어 청동기시대에서도 낫이 수확구로는 거의 이용되지 않은 것 같다.
형태는 매부리모양처럼 생긴 것과 등과 날이 같이 휜 것이 있다. 전자는 벽동 송련리, 강계 공귀리, 북창 대평리 등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후자는 무산 호곡동, 강계 심귀리, 서울 가락동, 부여 송국리, 진양 대평리, 대구 연암산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특히, 부여 송국리 54-15호 집터에서 출토된 돌낫은 길이 20여㎝의 대형으로서 자루를 묶을 수 있는 손잡이부분도 있다.
돌낫과 반달돌칼은 같은 수확구이지만 형태나 사용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돌낫이 날에 직교하게 나무자루를 끼워서 사용하는 수확구라면 반달돌칼은 한복판이나 등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보통 1개 내지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이 구멍 사이에 끈을 꿰어 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용한다. 수확 방법에서도 반달칼은 이삭을 바로 따는 반면, 낫은 곡물을 뿌리째 베는데 있다. 따라서 쇠낫이 유행하고 반달칼이 없어진 원삼국시대 이전에는 수확방법으로 이삭따기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