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에 있는 ‘6대손 상림(祥林)이 종현손(從玄孫)인 흠(嶔)에게 묘표를 부탁해 무오년(1918)에 기록한다’는 묘표의 내용을 근거로 집안에 보관되어 오던 유고를 자손들이 정리하여 1918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과 발문이 모두 없다.
6권 3책.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전남대학교 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 있다.
권1에 시 77수, 권2에 서(序) 9편, 기 9편, 발 5편, 설 2편, 전(傳) 3편, 권3에 잡저 20편, 권4에 서(書) 13편, 제문 6편, 축문 4편, 권5에 묘지명 5편, 묘표 4편, 권6에 행장 8편과 부록으로 치제문(致祭文)·제문·만사·상량문·월강사상향축문(月岡祠常享祝文)·행장·묘갈명·묘지명·묘표·우락당상량문(憂樂堂上樑文)·우락당기(憂樂堂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나 문은 화식(華飾)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시의 「팔우시(八愚詩)」 8수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연민 등을 나타내고 있다. 서(序) 가운데 「오복편람서(五服便覽序)」는 그의 저서인 『오복편람』의 성격을 간단하게 소개한 것이다.
잡저의 「답고한덕의문(答高漢德疑問)」과 「답이환규의문(答李桓圭疑問)」은 예설에 관해 풀이한 내용이다. 앞의 것은 70여 조목에 이르는 예설문답으로 상례(喪禮)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덕렬실친권제문목(李德烈失親權制問目)」은 부모가 집에서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을 때 날을 받아 3년상을 치르는 경우의 변례(變禮)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광노자정공원묘지후(書狂奴子鄭公遠墓誌後)」는 단종 때의 충신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관노(官奴)가 되었다가 사사(賜死)당한 정분(鄭苯)의 아들 정광로(鄭光露)의 묘지가 200여 년 뒤에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기록으로, 그 자손들이 선조를 찾기 위해 겪었던 어려움을 전해주고 있다. 「배자명(禙子銘)」은 마고자 모양의 소매가 없는 덧저고리인 배자를 어머니로부터 받아 입고, 그 은혜를 생각하며 배자의 모양을 묘사한 글이다.
「벽하대사사리탑비(碧霞大師舍利塔碑)」·「운담대사탑지(雲潭大師塔誌)」 등은 불교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경암윤선생언행기략(敬庵尹先生言行紀略)」은 그의 스승인 윤동수(尹東洙)의 언행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