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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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안창호(安昌浩)가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난징(南京)에 설립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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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4년 안창호(安昌浩)가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난징(南京)에 설립한 학교.
연원 및 변천

당시 상해임시정부가 극도의 침체상태에 들어감에 따라 경제적 곤란도 심하여져 일부 인사들은 생활방도를 찾아 난징으로 이주하였고, 청년들은 중국에 입적하여 여행권을 얻어 미국으로 유학할 길을 찾았다.

당시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한 지 2년째인 1921년에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어 부의장에 취임하게 되었으나 공산당의 전략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理想村) 후보지를 탐사하던 중 난징에 한서문(漢西門) 안 쌍석고(雙石鼓)에 집을 세내어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동명학원(東明學院)이다.

안창호는 특히 이들 학생들에게 민족혼과 어학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초기에는 수십명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대개 흥사단 단원이 많았다.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국민으로서의 책임감, 협동생활의 원칙, 민족지도자로서의 자세, 착실주의(着實主義) 등을 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뒤 국내에 흉년이 들어 미국으로 가기 위하여 중국으로 나오는 학생의 수효가 줄어 재학생이 20명 이내로 감소되었으며, 경상비의 부족으로 재류동포의 모금에 의존하는 형편이 되었다.

심지어는 교사를 건축하기 위하여 흥사단에서 보낸 기금이 경비로 충당될 수밖에 없었으나, 안창호는 학급수를 줄여서라도 학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선우 훈(鮮于燻) 등이 동명학원을 위하여 기부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안도산전서』(주요한, 삼중당,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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