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고구려의 동자홀현(童子忽縣, 일명 幢山縣 또는 仇斯波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동성현으로 이름을 바꾸어 장제군(長堤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시대에 수주(樹州)의 임내에 속하였다가 공양왕 때에 감무(監務)를 설치한 통진현(通津縣)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통진현 봉성면(奉城面)이었던 곳으로 이곳 봉성산에는 옛 산성이 있었고, 한강하류의 나루터로서 통진과 교하(交河)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1268년(고종 45) 몽고군이 이곳에 주둔하여 강화도를 공략한 적이 있었으며, 고려 말기 왜구가 침입하여 점령한 것을 최영(崔瑩)이 격퇴시킨 적이 있었다.
대안(對岸)의 심악(深岳)과 함께 이곳은 서울을 방어하는 데 큰 몫을 한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동자홀(童子忽)의 ‘동’자가 ‘아래’를, ‘홀’이 ‘골〔城〕’을 의미하므로 ‘아랫골’이라는 뜻에서 동성이 되었다. 지금의 하성면 일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