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책. 모필본. 1년마다 1책으로 되어 있다. 1925년·1928년·1931년이 결본이며, 남아 있는 것 중에도 결항이 많다.
주로 개인적인 일상사를 기록한 일기로서 역사적 사실을 전문적으로 다룬 서적은 아니나, 독립지사·의사·열사 등의 동태를 견문한 사실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그 시대 민족운동을 살필 수 있는 간접적 자료가 된다.
그는 『제국신문』과 『만세보』·『대한민보』의 발간에 인쇄인으로 참가하였다. 또,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 총무로 사장 이종일(李鍾一), 공장장 김홍규(金弘奎)와 함께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3,500매를 두번에 걸쳐 인쇄하였다. 이로 인하여 3·1운동 당시 5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25년 고양군으로 낙향하였다.
그 뒤 자주 서울을 내왕하면서 견문한 사실들을 수록하였다. 그는 천도교의 서울교구장으로 당시의 호칭은 종리원장(宗理院長)이었다. 1940년 8월 『조선일보』·『동아일보』 그리고 월간지 등이 폐간당한 상황에서 당시의 민족적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이 책에서는 1945년까지 민족운동의 견문사실을 매일 기록, 사료면에서 공백기를 보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천도교인의 입장에서 본 민족운동과 근대적 사상의 변천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평가되는 책이다. 원문은 성신여자대학교 국사학과 『한국사논총』 1집에서 3집까지에 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