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우화운홀(于火云忽) 또는 우차탄홀(于次呑忽)이었는데, 뒤에 오곡성(五谷城)으로 고쳤다. 757년(경덕왕 16)오관군(五關郡)으로 바꾸고 진서(鎭瑞)를 영현(領縣)으로 하였으며 한주(漢州)에 예속시켰다.
940년(태조 23)동주로 고치고 995년(성종 14)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1012년(현종 3) 군을 폐하여 평주(平州)에 합쳤다가, 원종 때 이곳에 왕의 태(胎)를 묻었다고 하여 서흥현령(瑞興縣令)으로 하였다.
이곳의 절령(岊嶺: 지금의 慈悲嶺)은 멸악산맥의 고개로 원종 때 동녕로총관부(東寧路摠管府) 관할지역과 고려의 국경이 되었고, 고려 말기 홍건적이 침입할 때 이성계(李成桂)가 적을 크게 물리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