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사는 문무왕 19년(679)에 당나라가 사천왕사(四天王寺) 창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신을 파견하자, 신라 왕실이 이를 속이려고 임시로 지은 절이다. 그 뒤 효소왕 1년(692)에 다시 지어 완공하였다.
절터는 낭산(狼山) 남쪽의 사천왕사에서 남쪽으로 좀더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급한 편이고, 그 남쪽에는 남천(南川)이 흐른다. 현재 동서 목탑터와 금당(金堂)터, 강당(講堂)터, 중문(中門)터, 회랑(廻廊)터 등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남쪽에는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서쪽에는 망덕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가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의 위치는 아닌 듯하다.
1969년∼1971년 3차례에 걸쳐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에서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금당터는 축소된 것으로, 원래의 받침 부분 너비가 동서(東西) 방향으로 좀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이 있던 자리에는 받침돌 아래의 바닥돌과 계단의 바닥돌이 남아 있으며, 동탑에도 대부분의 주춧돌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다. 중문터와 동서 회랑은 받침 부분의 범위가 확인된 정도지만, 회랑은 일부 자연석 또는 벽돌로 된 받침돌만 확인되었다. 특히 금당과 회랑 사이에는 익랑(翼廊)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신라의 쌍탑 가람에서 익랑이 필수적이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강당터는 훼손이 심하여 받침 부분의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에서 발견된 유구(遺構)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작은 암자 등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문 앞 경사진 곳에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거대한 돌계단이 있는데, 이것은 불국사의 경우와 같이 중문 앞에 규모가 큰 계단을 설치하는 방식이 당시 사찰 조영의 일반적인 사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