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맥(貊)은 예(濊) · 한(韓)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주된 구성체로서,『시경(詩經)』 · 『서경(書經)』등을 보면 중국 주대(周代)에 주나라의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뒤 북중국의 요동(遼東) · 만주지역으로 이동해 고구려 · 부여 등이 국명(國名)을 가지기 전까지 예와 맥으로 중국측 기록에 보인다.
이들은 북방정세의 변화 또는 다른 요인에 의해 한반도 내로 이주한 고구려와 계통을 같이하는 맥족(貊族)의 한 집단이었다. 맥국(貊國)의 위치는『삼국사기』지리지에 당나라 사람 가탐(賈耽)이 쓴『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를 인용해 “고구려의 남동쪽 예의 서쪽이 옛 맥의 땅인데 지금 신라의 북쪽이 삭주(朔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이며, 선덕여왕(善德女王) 6년(637)에 우수주(牛首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다”고 하였다.
또한『삼국유사』는 “춘주(春州)는 옛 우두주(牛頭州)로 옛날의 맥국인데 혹 지금의 삭주를 맥국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평양성을 맥국이라고 한다”고 하여 춘천을 맥국이라고 보고 있으면서, 일연(一然) 생존시의 삭주(지금의 평안북도)설과 평양성설을 추가하고 있다. 삭주설은 시대적 혼동이며, 평양성을 맥국으로 본 것은 고구려의 주요 구성체가 맥족이었으므로 고구려 초기에는 맥과 고구려라는 국명이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춘천지역을 맥국으로 비정(批定)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고금군국지』이다.『삼국사기』 · 『삼국유사』를 포함, 이후의 맥국 관계 기록은 대부분 이에 근거하고 있다. 지리지 이외의 맥국 관계 기록은『삼국사기』권1 신라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17년조와 19년조, 그리고 권24 백제 책계왕(責稽王) 13년조와『수서(隋書)』백제전의 기록에 보인다. 이는 춘천지역이 옛날 맥국임을 말해주고 있다.
춘천지역에는 맥국 관계의 지명 및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덕두원(德斗院)의 남방에 위치하는 삼악산성(三嶽山城)은 신라(또는 예국)의 공격을 받고 맥국이 최후를 마친 맥국산성(貊國山城)이라고 전해온다. 또 지금의 등선폭포는 당시에 쌀을 씻었던 곳이라 하여 ‘시궁치’, 아랫마을은 군사들이 옷을 말리던 곳이라 하여 ‘의암(衣巖)’ 등으로 불리운다.
이 밖에 일제강점기까지 보존되어 있던 토성(土城)인 우두산성(牛頭山城)도 맥국이 축조한 것이라고 하며, 춘천시 동면 월곡리에는 맥국왕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능산(陵山)이 있다. 한편 평창과 횡성에 걸쳐 있는 태기산(太岐山)은 평창에서는 맥국의 마지막 왕 태기가 신라(또는 예국)에 쫓겨 마지막 전투를 한 곳으로 전한다.
또한 맥국의 왕궁터로 전해오는 춘천시 신북면 발산 1리는 원래 이름이 바리뫼(발의뫼)로서 발(發: 貊과 같은 뜻)의 뫼란 말이고, 이 산을 맥국산 또는 왕대산(王臺山)이라 칭한다. 산 부근에는 대궐터를 의미하는 궐터마을 등 맥국관계 지명이 밀집되어 있다.
맥국의 건국과 소멸시기에 관한 구체적인 사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춘천 이남 지역이 일찍이 고구려의 현(縣)으로 편입되었고, 637년(선덕여왕 6)에야 비로소 신라 영역인 우수주로 편입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맥국은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독자적이고도 방기(放棄)된 소국가 형태로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춘천 맥국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춘천지역의 지석묘(支石墓)와 적석총(積石塚), 주거지 등의 분석을 통해 춘천 맥국을 청동기시대 말기와 초기철기시대를 거치는 500∼600년 간 존속했던 부족국가 내지 성읍국가 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춘천 맥국설의 중심이 되는 지석묘사회에 대한 논의는 크게 이들을 계급사회(階級社會)로 볼 것인가 평등사회(平等社會)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나뉘고 있다.
그런데 넓은 의미로서의 맥국은 흔히 말갈(靺鞨)로 기록되어 맥국으로보다는 말갈의 실체 규명을 위한 연구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맥국은 춘천을 중심으로 임진강 유역의 경기도 연천을 비롯해 북한강 유역의 경기도 양평과 남한강 유역의 충청북도 제천까지를 그 지역으로 넓게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맥국으로 상정할 수 있는 적석총이 이들 지역에도 존재하는 것에서 확인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