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는 만물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불교 교리이다. 본 교설은 브라만의 아뜨만을 부정하는 가운데 나타났다. 괴로움의 원인인 아뜨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제기된 교설이다. 일상생활에서 나에 대한 소유관념을 멀리하는 것이 무아의 실천적 의미이다. 초기 불교에서 행위 주체로서의 도덕적 자기는 긍정되었다. 즉 진실한 자기를 찾는 방법으로 아뜨만을 찾는 것은 권장한 것이다. 대승경전에서는 공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 이끌기 위해 무아를 설한다. 열반경에서는 진실된 자아를 찾는 초기 불교의 정신과 연결되어 무아를 해석한다.
무아는 범어로 anātman nirātman 등이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교설이다. 본 교설은 주1의 주2을 부정하는 가운데 나타났다. 또한 괴로움의 원인인 아뜨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제기된 교설이기도 하다. 인도의 여러 학파에서도 주3의 교설을 무아설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아설은 불교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교설이 되었다. 무아는 비아(非我)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어떤 것에도 내가 없다’, ‘어떤 것이든 나[아뜨만]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는 브라만 전통에서 주장하는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어떤 것이 나의 소유'라는 관념을 배척하는 의미가 있다. 나에 대한 소유 관념은 집착을 불러일으키고, 이로써 괴로움이 발생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소유관념을 멀리하는 것이 무아설의 실천적 의미가 된다.
쌍윳따니까야에서는 어떤 것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여 동요하는 사람들은 물이 말라서 강물이 적은 곳에 사는 물고기와 같다고 하거나, 수행을 완성한 사람은 탐욕을 떠나서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고 구하는 바가 없다, 진실한 수행자는 내 것이라는 집착없이 행한다 등 내 것이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다. 즉 이상적인 수행자는 내것이라는 집착을 멀리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붓다시대에는 도덕적인 의미에서 행위 주체인 자기를 긍정했다. 쌍윳따니까야에서는 아뜨만이 아닌 것을 아뜨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배척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뜨만을 아뜨만이라고 보는 일은 올바른 일이 된다. 즉 진실한 자기를 찾는 것을 권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4에서는 붓다가 노는 즐거움에 빠져있는 청년들에게 자기[아뜨만]를 찾을 것을 권하고 그들을 출가시킨다. 오히려 붓다는 쌍윳따니까야에서 자기[아뜨만]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악과 인연짓지 말라고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해쳐서는 안된다고 한다. 자기를 해쳐서도 안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사람은 자기를 해치는 것이라고도 정의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악덕과 번뇌의 근원이 되는 자기를 버려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자는 갑옷과 같은 자아의 존재를 깼다라고 하는 경전의 말은 자기의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즉 무아설은 아뜨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고, 단지 객체적 혹은 실체적 또는 기능적인 아뜨만에 반대한 것이다. 붓다는 아뜨만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질문에는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에서 무아는 어떻게 설명될까. 반야경에서는 붓다가 무아를 설하는 이유는 제자들이 공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열반경에서는 무아는 주5이고, 아는 여래라고하는데, 이것은 진실된 아를 찾는 초기 불교의 정신과 관련이 있다. 오히려 무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청정한 실천을 한들 이익이 없다고 한다. 이유는 모든 법이 무아라고 하면 이것은 주6에 빠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기가 머문다고 하면 이것은 주7이다. 이것은 붓다의 침묵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전일 가능성이 있는 주8에서는 아가 있다고 하는 경우에는 있다고 하는 견해를 없애고, 아가 없다고 하는 경우에는 없다고 하는 견해를 없애게 한다고 설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주석하면서 먼저 외도의 아집의 병을 깨뜨린 후에 이승의 무아에 집착하는 병을 타파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원효는 무아의 도리 그것은 바로 참된 자기라고 해석한다. 대승경전의 무아설은 대치의 의미가 더욱 더 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승경론에서는 무아에 대해서 인무아 · 법무아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붓다 시기 이후 초기 불교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설명하는 논리이다. 즉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오온의 화합에 의하여 형성된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자아를 형성하는 구성요소인 오온이라는 법은 존재한다고 하였고, 이는 실재론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되었다.
대승불교는 아비달마불교의 해석에 대한 비판으로, 주9이 모두 무아이고 일체가 모두 공이다라는 붓다의 설법대로 복귀하려고 하였다. 즉, 대승에서는 아비달마불교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둘 다 부정한다. 예를 들어 신라 견등이 저술한 『화엄일승성불묘의』에서는 성문은 인무아를 증득하지만, 법무아를 증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도륜의 유가론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도륜은 이승은 이미 인무아에 머물러 있어 언설법의 자성이 모두 공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놀랜다고 한다. 아함경전에서부터 대승경전 및 동아시아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제법무아는 변하지 않는 불교의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