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각대사 형미(逈微)는 신라 말기의 명승으로 체징선사(體澄禪師)를 사사하고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 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918년 속년(俗年) 54세, 승랍(僧臘) 35세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편광탑(遍光塔)’이라고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 년만인 946년(정종 1)에 건립되었다. 현재 무위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제(碑題)는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이라고 되어 있는데,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해서로 썼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용두화(龍頭化)된 귀두에 조각이 뚜렷한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두 귀의 모습은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 듯 조각하여 사납게 표현되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을 정연하게 배치하고 그 중앙에 비좌(碑座)를 설정하여 비좌 전후 2면에 운문(雲文)을 조각하고 양측에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비신 위의 이수에는 3단의 받침을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으로 장식하였는데, 이수는 상하 2석으로 겹쳐 쌓았으며 중앙에 방형의 전액(篆額)을 마련하고 있으나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수 주위는 모두 운룡문(雲龍文)과 쌍룡문(雙龍文)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사실성을 띠고 있어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