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구곡(武夷九曲)은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무이산에 위치하며, 기이한 층암절벽과 그 사이를 흐르는 주1가 수십 리에 걸쳐 펼쳐진 곳이다. 주자(朱子)라 불리는 중국 송나라 주2는 1183년 54세 되던 해에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은거하며 강론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듬해인 1184년에 주희는 무이구곡의 경치를 묘사한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무이도가(武夷櫂歌)라고도 한다.]」 10수를 지었는데, 첫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9수는 무이구곡의 실경(實景)을 묘사하고 있다. 원대(元代) 진보(陳普, 12441315)는 「무이도가」를 자연의 묘사를 통하여 도학(道學)을 공부하는 단계적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무이구곡도」는 주희의 「무이구곡도가」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문인들에게는 무이구곡의 정취를 담아낸 그림이면서, 주희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심정을 시각화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주희의 성리학은 고려말 조선초부터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었으며, 16세기에 이르면 유학자들에게 주희는 학문의 주3이자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가 은거하던 무이구곡은 주자 학문의 본령이자 이상향을 의미하게 되었다. 「무이구곡도」가 조선에 전해진 것은 16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서울에 있을 때 주자의 무이구곡을 그린 그림을 여럿 보았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성길(李成吉)의 「무이구곡도」는 16세기에 제작되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1591년에 제작된 두루마리 형식의 작품으로, 화면에는 감상자가 마치 무이산의 제1곡부터 제9곡까지 차례로 탐승하는 여정을 느끼게 표현되었다. 각 곡의 명칭은 따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각 곡의 특징적인 경관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그렸다. 「무이구곡도」는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있던 문인 사대부들에 의해 주로 감상되었다.
18세기에 이르면 향유 계층이 확대되고 병풍, 두루마리, 화첩 등 제작 형식도 다양해졌다.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무이구곡도」는 두루마리 형식이다. 화면은 문인화풍으로 간결한 주4로 구곡의 정경을 잘 표현하였다. 반면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주5 「무이구곡도」는 8폭의 연폭병풍으로, 1739년(영조 15)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로 능을 단장하는 일을 맡았던 도감의 관원들이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화면에는 무이산의 다양한 경물을 재구성하였으며, 경물을 치밀하게 표현하였다. 화원들의 솜씨로 뛰어난 조형성을 보이며, 청록산수 기법으로 그려졌다.
19세기에는 문인화가로 알려진 허련(許鍊), 20세기 전반에는 초상화가로 잘 알려진 채용신도 「무이구곡도」를 제작하였다. 또한 무이구곡의 확산으로 전통 형식에서 벗어난 「무이구곡도」의 제작도 적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무이구곡도첩」은 1785년(정조 8)에 그려진 것으로, 주요 경물을 의인화(擬人化) 내지 의물화하였다. 제2곡의 중심 경물인 옥녀봉(玉女峯)의 경우 여인이 한복을 차려입고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무이구곡도병」은 실제 경치와 무관하게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으로, 화면에 연꽃, 매화 등을 그리기도 하였다. 산과 계곡, 나무, 인물 등은 비례도 맞지 않는다. 이처럼 「무이구곡도」는 전통 형식의 작품부터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개성적인 민화 「무이구곡도」까지 다채롭게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