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구곡도가」는 중국 푸젠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계곡의 아홉 구비[九曲] 경치를 읊은 것이다. 무이산은 푸젠성의 제일 명산으로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이 있는 경치 좋은 곳이다. 약 8㎞의 계곡에 자리한 구곡은 각각 승진동(升眞洞), 옥녀봉(玉女峯), 선기암(仙機巖), 금계암(金鷄巖), 철적정(鐵笛亭), 선장봉(仙掌峯), 석당사(石唐寺), 고루암(鼓樓巖), 신촌시(新村市)이다.
남송(南宋) 때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는 1183년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썼고, 이듬해「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圖歌)」를 썼다. 「무이구곡도가」는 첫 수를 제외하고는 무이구곡의 산과 물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다. 자연 묘사를 주로 하면서 도학(道學 : 주자학․성리학)을 공부하는 단계적 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주자성리학은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야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 의하여 주자(朱子)의 사상과 작품들이 완전히 소화, 흡수되었다. 이 「무이구곡도」는 조선조 성리학자 사이에 주자학(朱子學)을 보다 가깝게 접하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무이구곡도」가 언제 어떤 형태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92년(선조 25)이성길(李成吉)이 그린 「무이구곡도」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이황과 이이 당시의 「무이구곡도」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 이전에 중국에서 건너온 초기의 「무이구곡도」는 조형적인 면에서 대상 묘사가 더 사실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성길의 「무이구곡도」를 실제 무이 계곡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비슷해서, 이 그림의 주제인 무이구곡을 아주 세밀히 그렸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도 회화 기법이 상당히 비슷하여 조선 전기 산수화의 양식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무이구곡도」는 이이가 지은 「고산구곡가」를 통해 중국적인 운(韻)을 따르는 시작법(詩作法)이나 묘사 대상인 자연에 대한 우리나라 시인·화가들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한 경향에는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같이 우리의 글을 한자와 섞어 쓰는 자연 묘사 시가(詩歌)도 영향을 미쳤다. 이이와 정철 때에 와서 우리나라 가사(歌詞) 문학에서 일어난 시대적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성리학의 자연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서술 태도가 시와 그림에 반영되도록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무이구곡도」라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가 그려지게 된 동기는 주희의 「무이구곡도가」에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조 성리학의 특수한 발전과 함께 주희의 「무이구곡도가」나 「무이구곡도」를 단순히 답습하는 학파와 이를 우리 산천에 근거하여 변형, 발전시킨 다른 학파가 나와 우리 회화사 발전에 구체적으로 작용하였다. 오늘날에도 구곡도가나 구곡도를 그린 화첩(畵帖), 두루마리 또는 병풍 등이 항간에 유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