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통치이념인 민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통치자에게 백성들의 생업의 어려움을 일깨우고 바른 정치를 펼치도록 하기 위한 관성(觀省)의 기능과 감계적(鑑戒的) 성격을 띠고 그려진 그림이 ‘무일도(無逸圖)’이다. 무일(無逸)이란 남의 위에 서는 사람은 일신의 즐거움이나 자기 몸의 편안함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서경』의 무일편은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섭정을 그만두고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조카인 성왕(成王)을 등극시킨 다음, 통치자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세를 충고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다. 주공은 통치자가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일은 백성이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선대 임금의 행적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중국 문헌에서 보이는 ‘무일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북송의 인종(仁宗) 때 학사였던 손석(孫奭)이 황제에게 「무일도」를 그려 바친 것을 강독각(講讀閣)에 걸어 두게 한 것이다. 또 1035년(인종 13) 새로 설치한 이영각(邇英閣)과 연의각(延義閣)에 「무일도 병풍」을 설치하게 한 사실이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태조의 ‘훈요10조’에 “『서경』무일도의 내용을 그려 붙여 출입 때마다 보고 관성하도록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고종 때의 중신이었던 김양경(金良鏡)이 대관전(大觀殿)의 어좌 뒤에 있던 「무일도병풍」에 관한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권근(權近)은 『입학도설(入學圖說)』에서 이 그림에 관하여 도해로써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초기부터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와 함께 궁중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또한 왕의 등극, 탄신, 지방 행차 등의 기념 선물로도 빈번하게 진상되었다.
세종 때는 중국의 인물과 풍속이 아닌 우리나라의 인물과 풍속을 담은 「무일도」가 최초로 그려졌다. 세종은 당시 예문관 대제학인 변계량(卞季良)에게 중국의「무일도」및「빈풍칠월도」에 의거하여 우리나라 백성들의 어렵고 힘든 생활상을 담은 월령(月令) 형식의 그림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조선 후기 숙종 때는 「무일도」를 ‘무일산수도(無逸山水圖)’라 부르기도 했으나 아직 작품이 발견되지 않아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