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는 난초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이전에 시문(詩文)에서 그 미덕이 찬양되어 왔다. 묵란(墨蘭)은 문인화의 소재(素材)인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로 묵죽(墨竹)과 묵매(墨梅)에 이어 11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발달하였다. 처음부터 먹으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는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으로 그려졌다.
북송(北宋) 이후 사대부 화가들에 의하여 묵란이 발달하게 되었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묵란 화가는 북송의 서화감식가로 알려진 미불(米芾)이다. 그 뒤 원나라 초기의 정사초(鄭思肖)는 뿌리 없는 난초를 그려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부터 중국의 사대부화 전통을 받아들여 문인과 선승(禪僧)들 사이에서 묵란화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말의 여러 문집에는 당시 중국 화단과의 교류에 관한 기록, 그리고 묵란화를 잘 그렸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현존하는 작품은 없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숙주(申叔舟)의 『화기(畵記)』에 의하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수장품 가운데 원대(元代)의 대표적인 묵란화가 설창(雪窓)의 「광풍전혜도(狂風轉蕙圖)」가 두 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려 말 조선 초의 사대부 화가들이 중국 화단의 영향 아래 묵란화를 그렸을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묵란화 중 가장 연대가 이른 작품으로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묵죽화가로 알려진 이정(李霆)의 그림으로,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로 그린 난화(蘭畵)이다. 또 이정과 거의 같은 시대의 작품으로 이징(李澄)과 이우(李瑀)의 작품도 전한다. 이들은 모두 난엽(蘭葉)이 뿌리로부터 부챗살처럼 비교적 평면적으로 뻗어나가다가 중간에 한 번 뒤틀린 모습을 보이며, 토파(土坡)는 간단한 선과 몇 개의 점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조선 후기에 오면 묵란도 다른 화목(畵目)처럼 좀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다. 이때의 묵란화가로는 임희지(林熙之), 사대부 화가인 강세황(姜世晃), 그리고 조선조 제일의 문인 서화가이며 이론가인 김정희(金正喜)와 그의 제자 조희룡(趙熙龍)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묵란의 양식도 다양해지고, 특히 난엽의 모습이 글씨 획(劃)과 유사성을 띠게 된다. 중기의 난엽이 비교적 평면적인 데 비하여 이때의 난엽은 공간에서 움직이고 뒤틀리며 뻗어나가는 듯 공간감과 입체감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또한 난엽의 비수(肥瘦 : 넓거나 좁음)가 많이 나타나고, 꽃과 잎의 농담 대조가 뚜렷하여 장식적 효과도 크다.
이와 같은 양식적 변화에는 김정희의 역할이 지배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그는 묵란화와 예서(隷書)를 동일시하고 예서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은 묵란화를 그리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원대의 사대부 화가 조맹부(趙孟頫)의 묵란화법인 삼전법(三轉法), 즉 난엽을 세 번 돌려 변화를 가하는 기법을 도입시켰다. 그의 난초 그림은 이와 같은 이론을 그대로 적용한 서예적인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18세기 초기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중국의 종합적인 화보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일부인 「난죽매국보(蘭竹梅菊譜)」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이 화보의 보급과 더불어 중국의 역대 묵란의 양식이 소개되고, 그 화법의 터득도 가능하게 되었다. 즉 중국의 화법을 소화하는 한편, 이론적 바탕에 근거를 두고 화가의 개성을 표현한 묵란화가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말기는 사군자 그림이 일반적으로 어느 때보다 널리 행하여졌다. 따라서 묵란화도 크게 성행하였으며, 후기 묵란화의 토대 위에서 개성 표현이 강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이때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하응(李昰應)과 민영익(閔泳翊)을 들 수 있다. 이들의 묵란은 양식적으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하응의 난초는 동적 구도, 많은 수의 난엽, 난엽의 심한 비수 등의 특징을 보이는 반면, 민영익의 그림은 뭉툭하고 비수가 없는 난엽을 그렸다. 그 밖에도 김응원(金應元), 방윤명(方允明), 김용진(金容鎭) 등이 묵란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