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극단(民衆劇團)은 1922년 서울에서 윤백남을 중심으로 창단되었다. 이 극단은 단장인 안광익(安光翊)을 비롯하여 송해천(宋海天)·안종화(安鍾和)·홍정현(洪廷鉉)·최일(崔日)·나효진(羅孝鎭)·최난방(崔蘭芳)·문수일(文秀一)·이월화(李月華) 등 1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신극(新劇)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윤백남은 연극 전용극장인 중앙극장(中央劇場) 건립을 주선하면서 그 전속극단으로 유능한 신파 연극인들을 모아 민중극단을 창단하였다. 이 극단은 그 목표를 “종래의 비열한 지위로 타락되었던 신극을 개량하여 예술적 지위를 향상하게 하며, 관중의 요구에 적(適)할만한 정도에서 순문예적 각본을 상연할 계획”이라고 선언한 바와 같이 신극을 지향하였다.
극단 창단과 동시에 지방순회공연을 가졌고, 1922년 2월 23일부터 서울에서 공연을 가진 이 극단은 윤백남의 작품에 전적으로 의존하여「등대직(燈臺直)」·「기연(奇緣)」·「환희(歡喜)」·「주먹이냐」등을 잇따라 공연하고, 지방공연에 나섰다.
1923년 2월에는 지방공연에서 상경하여 극단 재편성을 단행하였다. 전속작가로서 김정진(金井鎭)과 조일재(趙一齋)를 영입(迎入)하고, 윤백남은 무대감독으로서 직접 극단을 이끌었다. 윤백남 작「제야의 종소리」·「파멸」 등과 윤백남 번안「사랑의 싹」·「영겁의 처(永劫의 妻)」, 윤백남 각색「진시황」·「희무정(噫無情)」·「대위의 딸」등과 작자 미상의「영생의 종」·「돌아오는 아버지」·「의(義)와 애(愛)」·「월급날」 등을 공연하였다.
이 연극들은 광무대(光武臺)와 단성사(團成社)에서 주로 공연되었는데, 이는 애초 계획하였던 중앙극장 건립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실패로 1924년 이후 윤백남은 신극운동에서 영화운동으로 옮겨갔고, 대신 안광익(安光翊)이 극단을 이끌어「비파가(琵琶歌)」등의 신파극을 공연하였다. 이 극단은 점점 신파극으로 후퇴하였고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결국 1931년 임서방(任曙昉) 작「맹부(盲夫)」, 김영환(金永煥) 작「부자와 양반」, 문의봉 작「저주받은 사람들」, 하석조 작「무어 빠진 연애」등의 공연을 마치고 해체되었다.
이 극단은 3·1운동 이후 새롭게 자각한 신파 연극인들이 신극운동을 펼쳐보려고 창단한 극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역량부족으로 대중적인 신파극단에 머물렀다. 그러나 종래의 신파극단에 비하여 대본을 충실히 사용한 개량신파극단으로 평가할 수 있다.